싱가포르 A★STAR를 다녀왔다. 흔히 싱가포르 하면 무역이나 관광으로 먹고사는 나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싱가포르도 한때 석유화학, 전자 등의 자본집약적 산업에 치중하다가 21세기 들어 발 빠르게 지식산업으로 국가전략을 선회한 나라다. 2003년에 생명공학 첨단단지 바이오폴리스를 구축하고, 이제는 융합기술의 거점 퓨전폴리스를 만들어 정부가 적극적으로 기술개발 투자를 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인구가 518만 명밖에 안되고 면적은 서울보다 조금 크다. 그런데 1인당 국민소득은 5만 달러가 넘는다. 세계 금융위기로 잠시 주춤하기는 했지만 2010년에 경제성장률 14.5%를 달성했고, 2011년 5%에 이어 매년 비슷한 성장률을 이어가고 있다. 지식산업으로 급선회한 국가전략과 이를 효과적으로 뒷받침한 정부 정책 덕분이다. 작은 나라여서 가능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싱가포르 국가전략의 우수성은 충분히 주목할 만하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2011년 아시아의 기술혁신을 평가하면서 상위 12개 품목을 선정했다. 놀랍게도 그중 5개가 싱가포르의 기술이었다. 중국이 2개, 일본이 2개, 홍콩이 2개, 대만이 1개인 데 비해 괄목할 만한 성과다. 한국은 노메달이었다. 이런 이유로 보스턴컨설팅그룹은 세계 기술혁신 평가에서 싱가포르를 1위로 선정했고, 월드이코노믹포럼(WEF)은 9위, 인시아드(INSEAD)는 7위로 평가했다. 모두 한국보다 앞선다.
무엇이 싱가포르를 이처럼 짧은 기간에 지식산업의 선두에 우뚝 서게 만들었을까. 핵심은 싱가포르가 가진 국제화 마인드와 정부의 효과적인 정책역량에 있다. 전체 인구 중 순수한 싱가포르 국민은 3분의 2인 320만 명 정도다. 나머지는 외국인 영주권자와 단기체류자들이다. 싱가포르는 전 세계에서 뛰어난 인재들을 엄청난 연봉을 주고 초빙한다. 싱가포르 국립대학에도 한국인 교수가 30명이 넘는다. 얼마 전 세계적으로 연구업적을 인정받는 젊은 한국교수가 한국대학 연봉의 세 배 가까이 받고 싱가포르 국립대학으로 옮긴 경우가 있다. A★STAR에도 분야별 프로젝트 디렉터 대부분이 외국인이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싱가포르 정부이지만 국가전략에 필요하면 무엇이든 가능하도록 정책집행의 유연성을 보인다고 한다. 바이오메디컬 다국적 기업을 유치하려고 심지어 도로체계마저 바꾼다. 이처럼 모든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기 때문에 외국기업이 투자하기 제일 편한 나라가 되었다.
2002년 설립된 A★STAR(Agency for Science, Technology and Research)는 싱가포르의 생명과학 사이언스 파크, 바이오폴리스의 전략본부에 해당한다. A★STAR는 새로운 기술을 생산하기 위한 연구개발도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기능은 기술의 상업화에 있다. A★STAR는 싱가포르 정부 기술개발 예산의 4분의 1정도인 1조3000억 원의 예산을 매년 집행한다. 정부기관이지만 마치 컨설팅회사와 기술투자회사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덕분에 1990년 싱가포르 전체 경제에서 1.8%에 불과했던 바이오산업 비중이 2010년에는 8.6%로 성장했다. 지난 10년 사이에 바이오메디컬 기술개발 인력과 제조업 종사인력도 각각 2.5배 정도 늘었다.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은 A★STAR의 기술 중개 능력이다. 아무리 좋은 기술이 있어도 상업화는 쉽지 않다. 산학연 협력이 잘 되지 않는 이유도 기술의 상업화가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기술을 상업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건너야 하는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이 있다. 미국의 실리콘 밸리에서는 에인절펀드가 이 죽음의 계곡에 다리를 놓아준다. 하지만 우리나라나 싱가포르는 기술투자의 생태계가 빈약하다. 그래서 싱가포르가 택한 전략이 정부가 기술을 평가하고 전략적 투자를 해서 상업화의 다리를 놓아주는 것이다. A★STAR가 바로 이 전략의 브레인 역할을 했고, 이제 10년 만에 뿌린 것을 거둬들이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올해 과학기술 연구개발 투자에 17조 원이 넘는 예산을 쏟아 붓는다. 우리나라는 작년에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 투자액이 이스라엘 다음으로 세계 2위가 됐고, 총액도 영국을 제치고 세계 6위에 올라섰다. 그런데 기술의 상업화는 얼마나 이루어졌나. 정부출연연구소, 대학들이 엄청난 양의 논문을 쏟아냈지만 기술혁신이나 상업화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기술이 ‘죽음의 계곡’을 넘어 상업화로 가기 위한 다리가 없기 때문이다. A★STAR가 오히려 한국의 좋은 기술을 사가기 위해 기웃거리고 있는 현실이다.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붓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산된 기술을 어떻게 상업화하느냐가 창조경제의 핵심이다.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다른 사람이 벌어 가면 안 된다. 구슬이 서 말이어도 꿰어야 보배다. 기술개발 투자 못지않게 기술 상업화의 생태계 구축에 눈을 돌려야 할 때다. A★STAR는 저쪽 하늘에서 먼저 빛나고 있다.
염재호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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