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철이 다가오니 다시 ‘폴리페서’가 언론의 도마에 오른다. 본분인 강의나 연구는 소홀히 하면서 특정 후보를 따라 무리 지어 다닌다는 게 언론에 비친 이들의 모습인 듯하다. 세 대통령 후보 진영에 참여하는 교수들의 수가 무려 500명을 넘어섰다니 그런 비판이 나올 만도 하다. 필자도 한 후보의 정책을 조언하고 있다 보니 일부 언론사 기자가 몸담고 있는 학교에 찾아와 강의와 연구를 제대로 하고 있는지 취재를 하고 간 모양이다.
하지만 일부 언론에서 주장하듯 대선후보들의 정책 조언에 참여하는 이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상아탑의 순수성을 폄훼하는 ‘망국’과 ‘망학’의 원흉일까. 물론 무릇 학자의 존재 이유는 자연과학이든 인문사회과학이든 진리를 추구하는 데 있다. 그러나 진리 탐구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그 결과로 얻은 지식을 통해 보다 나은 삶과 사회를 만드는 데 보탬이 되려는 의지일 것이다. 새로운 지식을 전파하고 공감대를 구축해 정책에 반영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삶이 나아지는 것은 오히려 바람직한 일일 수 있다.
폴리페서들이 선거 기간에 강의와 연구를 소홀히 해 “상아탑의 순수성에 먹칠을 하고 교육을 뒤튼다”는 비판 역시 요즘의 대학 현실을 모르고 하는 이야기다. 10년 전, 20년 전에 비해 훨씬 엄격해진 강의평가와 연구업적 관리 덕분에 본업을 소홀히 하는 교수는 승진은커녕 아예 퇴출위기에 직면하게 된 지 오래다. 이미 정년을 보장받은 원로교수들은 그런 평가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강의도 부실하고 연구업적도 없는 퇴물 학자를 어느 대선 캠프에서 끌어들이려 하겠는가.
더욱이 정부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정책연구 인력이 그다지 많지 않은 한국적 상황에서 새로운 정책 개발을 위해 대학교수들이 맡아야 할 역할이 그리 간단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경북대 이정우 교수가 얼마 전 이런 말을 했다. “폴리페서가 나서지 않으면 한국의 개혁은 요원하고 희망이 없다. 개혁적 학자들이 책을 일시 물리고 나랏일을 걱정하는 것은 권장할 만한 일이지 결코 비난할 일이 아니다.” 필자도 동의한다. 경영학자가 기업을 컨설팅하고 공학자가 기술개발을 자문하듯 사회과학자가 정책개발을 돕는 일도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폴리페서의 역할과 관련하여 한 가지는 분명히 해 두고 싶다. 이들의 역할은 정책을 생산하고 조언하는 것이지 정·관계 고위직을 차지해 직접 집행에 나서는 일은 아니라는 점이다. 쉽게 말해 장·차관 자리를 욕심내지 말라는 것이다. 우선 교수들에게 그러한 직책을 수행할 만한 능력과 전문성이 있는 경우가 흔치 않다. 정부부처는 해당업무에 수십 년간 종사해온 엘리트 관료들로 이뤄진 고밀도 조직체다. 학교에서의 행정 경험밖에 없는 이들, 학자들 사이의 커뮤니케이션 경험이 전부인 이들이 이러한 조직을 관리할 만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는 경우란 상상하기 어렵다. 정·관계 연줄이 없는 이들이 정부부처 간 정책 조율을 원만히 하기도 쉽지 않다. 게다가 학자 시절의 지론에 얽매여 정책적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하기도 하거나 국정을 자기 지론의 실험장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
더욱이 국가안보 문제를 다루는 자리라면 한층 더 그렇다. 학교에서의 행정 경험밖에 없는 이들이 방대한 조직을 관리할 수 있을지, 상아탑의 담론이나 자문교수 경험만으로 5000만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좌우할 수 있는 절체절명의 결정을 내리는 일이 과연 가능할지, 대통령을 위해 국회와 언론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이들을 설득해낼 헌신과 배포가 있을지 정말로 쉽지 않은 일이다. 긍지와 명예로 살아온 학자들이 오로지 ‘대통령을 위해서’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온갖 수모를 무릅쓰고 자존심을 죽이는 일이 과연 가능하겠는가. 필자가 참여정부 당시 제의 받았던 정보기관장이나 청와대 고위직을 끝내 고사하고 비상근직을 고집했던 것도 이런 생각이 한 이유였다. 필자에게는 불행히도 그런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개인의 경험을 성급하게 일반화하고 있는 것일까. 대부분의 교수가 필자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학자들의 선거 참여는 어쩌면 공적 봉사의 일환일 수도 있다. 이들이 만들어 낸 정책 아이디어가 한국 사회를 더욱 건전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자리 할 욕심’으로 선거에 매달린다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혹시라도 정책을 집행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교수는 차라리 지금 당장 대학을 떠나 ‘생즉사 사즉생’의 자세로 후보를 위해 뛰어라. 그런 마음가짐이 아니라면 자리 욕심은 버려야 한다. 폴리페서가 나쁜 게 아니다. 분수를 모르는 폴리페서가 위험할 뿐이다.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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