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훗날 정순왕후(貞純王后)가 된 어린 김씨는 오흥부원군 김한구의 딸로 15세 나이에 영조의 계비로 간택됐다. 간택 당시 영조의 춘추 66세였으니 자그마치 51세의 나이 차이가 났던 것이다. 심지어 영조의 아들인 사도세자보다도 열 살이 어렸다. 한마디로 조선 개국 이래 가장 나이 차가 큰 왕과 왕후였다.
# 1757년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3년상을 치르고 영조는 아버지 숙종이 남긴 뜻에 따라 후궁들 중에서 왕비를 책봉하지 않고 새로 왕비를 간택했다. 후궁 희빈 장씨를 중전 자리에 앉혔다가 말로 다 못할 곡절을 치른 숙종으로서는 당연한 유지(有旨)였으리라. 일단 간택령이 내려지면 전국의 15~20세의 양반집 규수들은 일체의 혼사를 멈추고 사주단자를 올려야 했다. 대개는 왕대비나 대왕대비가 간택의 최종 권한을 갖지만 임금이 직접 간택에 나선 경우도 있었다. 영조가 그랬다.
# 1759년 66세의 영조가 직접 간택에 나선 것은 늙은 남자의 엉뚱한 호기심의 발로는 아니었을 듯싶다. 그는 무수리 출신이었던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의 지위에서 곡절 끝에 30세가 돼서야 왕위에 올라 52년간 재위하면서 조선왕조 사상 가장 오랜 치세를 누린 왕이었다. 들어온 사주단자로 미뤄 보아 어차피 새 왕비와는 45~50세의 나이 차가 날 것은 뻔한 이치였다. 그러니 그가 굳이 직접 왕비 간택에 나선 것은 여색을 밝힌 경망된 처신이었다기보다 오히려 최소한 말이 통하는 사람을 직접 찾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었으리라.
# 영조는 간택 면접에서 규수들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물었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이 무엇이냐?”고. 대체로 규수들은 “산이 깊다” “물이 깊다”는 식의 교과서적인 답을 했다. 그러나 유독 훗날 정순왕후로 간택받은 어린 김씨만이 “인심이 가장 깊다”고 답했다. 물론 그 물음에 정답이 따로 있었을 리 없다. 하지만 이 대답이 영조를 사로잡았다. 이에 영조는 다시 물었다. “가장 아름다운 꽃이 무엇이냐?”고. 이에 어린 김씨는 ‘목화꽃’이라고 답한 후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목화꽃은 비록 멋과 향기는 빼어나지 않으나 실을 짜 백성들을 따뜻하게 해주는 꽃이니 가장 아름답다”고 말이다. 할아버지 나이뻘 되던 영조가 이 말을 듣고 어찌 감탄하지 않았으랴! 말이 통하는 정도를 넘어 그 한마디 한마디에 나이에 걸맞지 않은 깊이와 너비가 있음을 영조인들 왜 느끼지 못했으랴. 결국 어린 김씨는 왕비로 간택돼 같은 해 음력 6월 22일 창경궁에서 혼례를 올렸다. 그 혼례의 전모를 담은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를 보면 영조가 정순왕후를 데리고 궁으로 가는 50면에 달하는 ‘친영반차도’가 실려 있는데 379필의 말과 1299 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그만큼 영조는 계비 정순왕후를 맞이하는 데 정성을 들였다.
# 1776년 영조가 83세를 일기로 승하했다. 정순왕후는 영조와 17년 남짓 산 셈이다. 그사이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는 희대의 사건도 있었다. 역사의 격랑 속에서 정순왕후 역시 세파에 시달렸다. 그녀에 대한 역사의 평가도 갈린다. 하지만 그녀가 열다섯 어리고 앳된 나이에 국모가 되는 간택의 순간에 했던 한마디는 2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를 울린다. 그렇다. 세상에서 가장 깊은 것은 인심(人心) 곧 사람의 마음이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하지 않던가. 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깊은 것이다. 따라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얕은 수로는 안 된다. 천근, 만근 같은 무게가 있어야 하고 태풍처럼 바닷속 깊은 심저까지 뒤집는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뽐내는 겉멋과 향취가 아니라 목화꽃처럼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따뜻하게 만드는 철저한 자기희생의 자세다! 이것을 작금에 대통령이 되겠다고 동분서주하는 이들과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귀에 담고 눈에 넣고 마음 깊이 새겼으면 한다.
정진홍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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