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나라 경제력은 '돈'에 응축돼… 외국에선 안 통하는 한국 '원'
엔화는 어디서나 바꿀 수 있어… 韓日 통화 스와프는 우리가 '乙'
MB 정부 원화 가치 17% 하락…金처럼 튼튼한 화폐 되게 해야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은행 의장이 작년 언젠가 뉴욕 투자자들 모임에서 강연을 끝냈다. 주최 측은 물었다. "강연료를 달러로 드릴까요, 아니면 유로화나 엔화로 드릴까요?" 그린스펀의 대답은 "포 나인으로"였다. 숫자 9가 넷인 '포 나인(four nines)'이란 순도(純度) 99.99%짜리 금괴를 말한다. 요즘 같은 위기엔 어느 나라 통화도 믿을 수 없다는 농담이었다.
국가신용등급은 빚을 갚을 능력을 측정하는 도구이고, 국내총생산(GDP)은 국가 경제의 덩치를 재는 지표다. 어떤 나라의 경제력이 가장 옹골지게 응축(凝縮)된 곳은 그 나라의 돈이다. 경제가 건강하면 통화에 힘이 실리고, 경제가 무너지면 통화도 함께 사라진다.
40여년 전 캄보디아의 돈은 하루아침에 휴지가 됐다. 경제가 처참한 지경에 몰리자 새 정권이 들어선 후 기존의 국가 화폐를 무효화했기 때문이다. 캄보디아 사람들은 옛 지폐를 이어 붙여 쇼핑백이나 지갑으로 재활용했다.
에콰도르는 2000년 1월 재무부 건물 앞 광장에서 자기 나라 화폐를 불태우는 세러모니를 가졌다. 미국 달러를 에콰도르의 공식 화폐로 선포한 직후였다. 햄버거도 달러로 팔기 시작했고 은행 예금도 달러로 받았다. 하지만 '미국의 식민지가 될 수 없다'고 울부짖는 데모는 없었다. 국회에서 몸싸움도 없었다. 반복되는 인플레, 금융 위기, 외환 위기에 진저리 쳤던 에콰도르 국민은 자기네 지폐가 연기 속으로 사라지는 화형식에 박수를 쳤다.
우리 원화(貨)가 캄보디아·에콰도르의 화폐처럼 몰락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국은 G20 멤버이고 국가신용등급도 A급이다. 전 세계 반도체 시장을 휩쓸고 세계 최강의 조선 회사도 거느리고 있다. 이런 나라의 멀쩡한 통화가 어느 날 돌연사(突然死)한다는 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원화가 한두 번의 조작 실수로 컴퓨터 속의 비밀 파일이 사라지듯 급사(急死)할 리는 없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다른 의문을 던져봐야 한다. 무역 규모 세계 9위, 경제 규모 세계 15위 국가의 화폐가 왜 외국에서는 도통 통하지 않는 것일까. 왜 '10억원'이라고 인쇄된 원화 채권이 도쿄나 런던에서는 팔리지 않고 서울에서만 팔리는 것일까. 왜 뉴욕의 주요 은행에선 5만원권 현찰 뭉치를 들고 가도 달러로 바꿔주지 않는 것일까.
우리가 연변 조선족 마을의 식당과 방콕의 한국인 단골 골프장에서 우리 지폐를 받는 것에 감격할 때는 지났다. 어쩌다 해외여행 중 한국 돈으로 계산이 끝나는 걸로 '조국(祖國)의 힘'을 느끼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기도 쑥스럽다. 국제금융 시장에서 아무런 존재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는 게 원화이기 때문이다.
사담 후세인은 미국과 싸우며 원유 수출 대금을 유로화로 받으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그가 마지막으로 숨어들어 간 지하 굴에서 체포됐을 때는 75만달러의 현찰 뭉치가 함께 나왔다. 미국을 그토록 증오했던 후세인마저 생사(生死)가 갈리는 궁지에서는 달러만을 비상금으로 쓸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독도를 둘러싼 분쟁 여파가 통화 마찰로 번졌다. 일본은 한국이 통화 스와프 협정을 연장해달라고 무릎을 꿇어야 통화동맹이 이어질 것이라고 했다. 그들은 한국의 급소 어느 곳을 찔러야 피눈물을 흘릴지 '눈물샘'을 잘 알고 있다. 엔화는 세계 어디서든 달러나 유로화로 바꿀 수 있는 돈이지만, 원화 채권이나 한국산 금융 상품은 후세인의 달러 뭉치 같은 비상용이 되기는커녕 위기 조짐만 보이면 가장 먼저 내던져야 할 돌이라는 것을 꿰뚫고 있다.
일본은 4년 전에도 우리가 2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액을 갖고서도 쩔쩔매는 꼴을 바로 옆에서 보았다. 지금 우리가 3200억달러가 넘는 보유 외환을 자랑하지만, 그중엔 미국 주택금융공사에 볼모로 잡혀 있는 게 얼마라는 것, 급할 때 현금으로 동원할 수 있는 금액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간파하고 있다.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달 중국에 "양국 간 통화 스와프를 상설화하자"고 제안했다. 통화동맹을 영구화하자며 머리를 조아린 것이다. 일본에도 이제 자존심을 접고 허리를 굽혀야 할지, 아니면 덤터기를 다음 정권에 떠넘기고 튀어야 할지 결정해야 할 순간을 맞았다.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 환율은 1달러에 949원이었으나 5일 시세는 1111원으로 17%가량 상승했다. 원화가 그만큼 가치를 잃은 것이다. 원화가 갈수록 천덕꾸러기 통화로 신분이 강등되는 줄도 모르고 자동차·반도체 수출만이 최고라고 여겨왔던 결과다. 나라 경제가 이만큼 컸으면 원화를 금 덩어리처럼 튼튼한 화폐로 만들어 보겠다는 지도자가 나올 때도 됐다.
송희영 논설주간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0/05/2012100501108.html
'교양있는삶 > 사설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늘과 내일/정성희]김용 총재가 양성평등 전도사 된 이유 (0) | 2012.12.26 |
---|---|
성욕 해소에 여성 인권이 희생돼선 안 된다 (0) | 2012.12.26 |
[삶의 창] 주일 미사와 자동차 / 호인수 (0) | 2012.12.26 |
[크리틱] 어느 에세이스트의 절필 / 오길영 (0) | 2012.12.26 |
[삶과 문화/10월 4일] 보험이라는 신 (0) | 2012.1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