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어느 교육평론가의 답변. “잘 먹는 것, 잘 자는 것, 잘 읽는 것.” 앞의 둘은 많이 하는 이야기다. “잘 읽는 것”은 조금 뜻밖이다. 곰곰이 따져보니 말뜻을 얼추 짐작하겠다. 잘 먹고 잘 자는 것은 건강에 긴요하다. 하지만 인간은 그것만으로는 ‘인간다움’의 경지에 이르지 못한다. 인류의 정신적 유산들을 “잘 읽는” 수련의 과정을 거칠 때 양식 있는 시민이 탄생하고, 활력 있는 시민사회가 형성된다. 글 읽기의 힘이다. 미국 어느 대학에서는 4년 교과과정 전부를 고전읽기로 채운다는데, 나는 그런 대학이 부럽다. 한국에서는 고전읽기조차 입시를 위한 요점정리의 대상이 되고 있으니 말이다.
잘 읽기 위해서는 읽을 만한 좋은 글이 많아야 한다. 케케묵은 말처럼 들리지만 (인)문학의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도 그런 고전들이 긴 시간의 테스트를 통과해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근대문학의 총아인 (장편)소설을 비롯해 서정시, 희곡을 살펴봐도 그 나름대로 합의된 고전의 윤곽을 그릴 수 있다. 그들은 ‘한국문학공화국’의 ‘적자’들이다. 그러나 에세이는 합당한 대우를 못 받는 ‘서자’이다. 잡다한 신변잡기를 풀어놓은 가벼운 수필(미셀러니)은 많지만, 삶에 대한 통찰을 그만의 문체로 표현하는 ‘에세이’는 매우 적다. 고독하지만 독립적인 정신의 표현을 가능케 하는 건강한 개인주의의 뿌리가 깊지 못한 한국 문화의 척박한 토양도 한 이유이리라.
고종석이 우리 시대의 탁월한 에세이스트라고 평소 생각해왔다. 고종석이 펼쳐온 다양한 글쓰기의 알짜는 에세이이다. 그가 앞으로 ‘직업적 글쓰기’는 하지 않겠다고 절필 선언을 했다. “소수의 독자들이 내 글에 호의적이긴 했지만, 내 책이 독자들에게 큰 메아리를 불러일으켜 많이 팔려나간 적은 없다. 설령 내 책이 꽤 팔려나가고 운 좋게 거기 권위가 곁들여졌다 해서, 그것이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중략) 미심쩍었다. 글은, 예외적 경우가 있긴 하겠으나, 세상을 바꾸는 데 무력해 보였다.”(<한겨레> 9월24일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는 글쓰기의 영향력에 큰 회의를 갖게 된 듯하다. 안타깝다. 내 생각에 글은 세상을 크게 바꿀 수 없다. 글쓰기는 힘이 없다. 글쟁이 자신, 혹은 글을 읽어주는 “소수의 독자들”의 마음을 아주 조금 바꿀 수 있을 뿐이다. 그게 ‘문학의 정치’ 혹은 ‘글쓰기의 정치’의 한계이지만, 그런 미약한 글쓰기들이 모여 아주 가끔은 의미있는 세상의 변화를 이끌 수도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아니, 어쩌면 이런 기대 자체가 잘못 설정된 게 아닐까? 글쓰기는 결국 그 누구도 아닌 글쟁이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그렇듯이. 평화운동가 에이브러햄 머스트(1885~1967)의 일화. 그는 베트남전쟁 당시 백악관 앞에서 밤마다 촛불을 들었다. 어느 비 오는 날 저녁, 한 방송 기자가 물었다. ‘혼자서 이런다고 세상이 변하고 나라 정책이 바뀌리라고 생각하십니까?’ ‘난 이 나라의 정책을 변화시키겠다고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이 나라가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는 겁니다.’ 글쓰기의 소임도 그렇지 않을까. 거창하게 남들을 변화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못된 국가와 비틀어진 현실이 “나를 변질시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가냘프지만 의미있는 행위.
에세이스트 고종석이 조만간 ‘한국문학공화국’의 시민으로 귀환하기를 한 애독자로서 희망한다.
오길영 충남대 교수·영문학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4481.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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