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배고프다는 나라는 흔하지 않죠."
최근 만난 세계적 신용 평가 회사인 무디스 관계자는 "외국인들이 보는 한국 경제의 강점은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사모펀드 운영자 등 글로벌 전주(錢主)들을 만나며 그들의 속내를 듣는 사람이다. 최근 우리 경제에 대한 해외의 칭찬이 잇따르는 이유를 찾고 싶었다. '한층 강화된 위기관리 시스템' 같은 모범 답안은 2%쯤 부족한 듯했다.
그런데 그 답이 '아직도 배고픈 나라'였다. 우리가 아직 배고프다고? 이제 신흥국을 벗어나 선진국 대열에 들어서려는 나라인데? 이런 궁금증에 대한 그의 설명은 이랬다.
"국민소득 2만달러 넘는 나라 중에서 한국처럼 온 국민이 배고프다고 하는 나라는 별로 없다. 물론 이런 점 때문에 부작용도 있겠지만, 이런 정신 때문에 한국은 발전할 여지가 크다고 외국인들은 본다. 남에게 지기 싫어하고, 남에게 신세 지는 것보다 스스로 뭔가 해보려는 정신이 살아있는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브릭스(BRICs) 나라 중에서 '배고프다'는 나라는 별로 없다. 동남아 국가들도 마찬가지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늘 배고파하라(stay hungry)'고 한 축사에 미국인들이 열광했다. 한국인들은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인은 늘 배고프고, 그게 당연하니까. 그런데 미국에서는 억만장자 입에서 나온 이 말이 엄청난 각성제였다."
그렇다. 가만히 보면 우리 사회엔 '아직도 배고프다'는 사람으로 가득하다. 기업마다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입에 달고 사는 것도 그렇고, 자식 교육에 목을 매는 일도 그렇다. 60세 넘어서도 일하고 싶다는 신(新)중년들이 그렇고, 제발 일자리만 만들어 달라는 청년들이 그렇다.
이런 측면에서 우리 정치 지도자와 정책 당국자들은 아주 행복한 사람들이다. 일부 남미 국가나 남유럽 국가처럼 '배고프다'를 잊고 사는 나라에서는 어떤 정책도 '백약이 무효'이다.
얼마 전 사석에서 '한국적 평등 의식'이 우리 발전의 원동력이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늘 일본을 우습게 보며 추격할 수 있었던 것도 '내가 왜 못할쏘냐' 하는 한국적 평등 의식 때문이라고 했다. 그런 의식을 경제성장이란 목표에 접목했을 때 우리는 행복했고, 나라도 행복했다. 반면 이웃을 헐뜯고, 사회를 '빈부'로 갈라 세우는 데 접목하면 '평등 의식 망국론'이 나온다. '아직도 배고픈 우리'도 마찬가지다. 경쟁자를 잘 골라야 한다. 글로벌 경쟁자와 싸울지, 좁은 울타리 안에서 우리끼리 싸울지는 우리가 선택해야 한다. 배고픈 원인을 따지고, 모든 문제를 배고픈 탓으로 돌리는 데 시간을 소비할 수만은 없지 않은가. 우리의 성공 방정식은 유효기간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래도 유효한 것은 많다. 동시에 우리 사회는 배고프다는 사람을 '자산'으로 대접해야 할 것이다.
이인열 경제부 차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9/22/201309226700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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