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하셨습니다. 북한의 핵 위협과 생떼를 물리치고 ‘신뢰프로세스’의 내공을 만방에 보였으니 보국(輔國)의 칭송을 받을 만합니다. 정권 출범 6개월, 미국과 전통적 우정을 쌓고, 중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었으니 이보다 더 든든한 외치(外治)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명박(MB) 정권 역시 외교와 국제 세일즈는 일품이었습니다. 내치(內治)가 없어서 문제였죠. MB정권은 3년차에 ‘공정사회론’을 내세워 내치에 돌입했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초기 성과가 궁핍했습니다. 그때부터 집권세력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그 예정된 행로가 우려되어 변정고언(辨政苦言), 정국을 분별해 쓴소리를 올리려 합니다.
8·15 경축사에서 경제동력과 일자리 창출을 강조하셨지요. 백번 맞습니다. 그런데 왜 울림이 없을까요? 서민들에게 가장 확실한 경제활력의 지표는 바닥경기입니다. 건설노동자, 택시기사와 대리기사, 전국을 뛰는 운송기사가 약 400만 명에 이릅니다. 서민시장이 활기를 띠어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쪼들리지 않을 때가 호황입니다. 국민행복은 이들의 웃음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만기친람(萬機親覽)하시면 국정어젠다가 흐릿해집니다. 정치는 살림살이를 넘어서는 것, 소소한 쟁점들은 각료들에게 위임하고 큰 정치에 집중해야 합니다. 성장, 분배, 남북문제가 그것이죠. 정책사령탑은 작동하나요, 각료들은 토론합니까? 국무회의가 좀 시끄럽기를 바랍니다. 노트북을 치우라고 하세요. 받아 적기만 하는 각료들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한국이 관료, 율사, 장군 공화국인가요? 이들은 변칙과 파격을 싫어합니다. 청와대 외곽에 경로당 차리셨나요? 노련함으론 경장(更張)이 어렵습니다. 장외투쟁 중인 민주당을 끌어들여야죠. 우아하고 단호한 카리스마에 유연성이 결합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마지막 일년을 제하면, 이제 3년 반이 남았습니다. 네 가지만 제언하려 합니다.
성장정책이 없다. 삼성·현대·LG가 주도한 혁신이 한국을 살린 성장동력이었다. 성장패턴은 바뀌지 않고 중소기업이 부진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큰 기획과 구상이다. 언제나 그랬듯, 현 정부도 작고 소소한 프로그램들에 매달려 6개월을 소모했다. 경제팀은 뜻밖에 빈약하다. 6개월간 정부는 규제정책, 즉 ‘경제민주화’에 올인했는데 약간의 성과도 있겠지만 법안이 발효되면 경기는 일단 탄력을 잃을 것이다. 이 단계에서 경제민주화는 총수비리 척결, 불공정거래 시정, 중소기업 보호 정도로 충분하다. 내수진작과 성장정책은 아예 실종됐다.
‘창조경제’는 목하 논쟁 중이다. DJ키드가 요즘 인터넷산업의 총아이듯 근혜키드는 어디에서 나올까? 대안은 바이오·정보통신·미디어산업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70년대 초 그랬듯이 바이오밸리, ICT밸리, 미디어밸리를 미래 경제기지로 건설해야 한다. 그곳에 각 분야 전문가·과학자·자본가·CEO들이 매일 아침 모이는 아이디어 시장(市場)을 서게 해야 한다. 생태계 조성과 시장활성화는 정부 몫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풀 죽은 과학자·전문가·영재청년·괴짜들의 눈을 반짝이게 해야 한다. 디자인·영상·애니메이션·게임에 인생을 바치려는 준재들이 서로 경쟁하는 창조밸리를 건설하는 것이 답이다. 창조경제의 꽃이 여기서 피어난다. 문화융성? 영화에 미친 자는 미디어밸리에 모여 꿈을 펼치면 된다. ICT밸리는 스마토피아를 꿈꾸는 과학영재들의 집단서식처다. 그렇게 기획, 설계하고 만들면 된다. 인재들이 의사와 법관으로 몰리는 나라는 곧 불행해진다. 지금이 바로 그 꼴이다.
누구나 일자리를 외치지만 한국에서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막는 최대 장애가 노조임을 지적하지 않는다. 괜히 벌집 쑤셨다가 정치생명이 끝날 위험이 있다. 노조는 이익집단이 됐다. 경제민주화 입법안에도 노조는 열외다. 환노위·정무위를 투 톱으로 하는 총공세에 노조는 흐뭇할 뿐이다. 박 대통령의 공약에 민주당의 주문이 얹혔다. 꼭 필요한 법안도 있지만, 핵심 쟁점은 빠졌다. 일자리 창출 잠재력은? 노조는 어떡할래?다. 청년백수·조기정년이 만연된 시대에 밤샘작업 노동자는 전체 15%(약 200만 명), 주 52시간 장시간 노동자는 30%(약 400만 명)에 달한다. 뭔가 모순적이나 노조의 비호하에 건재하다. 규제법안들과 막강노조가 결합된 주력산업에서 일자리 창출은 불가능하다.
정부는 노동시간을 각각 200시간 줄여 신규 일자리 238만 개를 창출한다는 로드맵을 발표했다. 오랜만에 괜찮은 정책이지만, 전제요건이 빠졌다. 노조다. 노조 승인이 없는 한 노동시간 단축은 어렵고, 승인해도 ‘임금삭감 불가’ 조건을 달 것이다. 게다가 고용연장이라니! 정치권은 정치적으로만 풀리는 이 과제를 관료들에게 전가해 왔고, 관료는 행정과 통계풀이로 본질을 비켜갔다. 고용 70% 로드맵 1번은 ‘노조 담판정치’여야 한다.
‘일자리 창출’은 기업, ‘일자리 나누기’는 노조, ‘일자리 지키기’는 정부의 몫이다. 기업엔 임금비용을 낮춰주고, 노동자에겐 공공복지를 늘려줘야 한다. 그래야 정규직이 ‘일자리 나누기’를 솔선할 인센티브와 명분이 생긴다. 이런 상생구조가 일자리 정치의 요체이거늘, 이런 제도 혁신 없이 2만 달러 경제까지 올라선 것은 기적이고 요행이다. ‘요행의 천운’이 이제 소진했음을 누구나 알고 있다. 어쩔 것인가, 이대로 내리막길을 갈까, 아니면 지혜를 모을까? 정치권은 이 난제를 버렸다.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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