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고등학교 국어 수업 시간.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한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를 읽고 단답식 10문제를 푼 뒤 짧은 감상을 쓰는 수행평가가 진행됐다. 첫 번째 문제는 ‘이 이야기의 시대 배경은 언제인가?’였다. 그런데 ‘일제 시대’라고 답한 아이들이 여럿 나왔다. 선생님이 물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사람이니까 일제 시대 아니에요?” 또 다른 아이는 이순신이 실제 인물이냐고 물었다. “광화문에 가면 장군 동상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순신 장군 동상이지요. 실제 인물입니다.” 선생님이 진지하게 설명하자 새로운 질문이 이어졌다. “그럼 심청이는요? 춘향이는요?”
웃자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서울의 한 전문계 고등학교 국어교사를 지낸 조혜숙 선생님의 교단일기 ‘울퉁불퉁한 날들’에 나오는 12월 어떤 날의 기록이다. 그렇다고 조 선생님이 대학 입시와 거리가 먼 전문계고의 낮은 학업 수준을 개탄하려고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그의 교단일기는 답답한 현실과 아이들의 고민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 때론 울컥하게 만든다. 일기 말미에 ‘아무것도 안 읽는 것보다는 만화책이라도 읽는 게 낫다’며 아이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유익한 만화책이나 많이 발간되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적기도 했다.
‘우등생 만드는 습관의 힘’을 쓴 조일민 씨는 오랫동안 입시학원을 운영하며 아이들을 관찰한 결과, ‘공부 잘하는 아이’와 ‘공부 못하는 아이’를 구분 짓는 몇 가지 특징을 찾아냈다. 그중 하나가 어휘력. 중간고사를 앞두고 중학교 3학년 국사 과목을 정리하던 중 세종대왕이 변방에 자주 침입하던 여진족을 군사력으로 제압하거나 회유하는 강온 양면정책을 썼다는 대목이 나왔다. “선생님, 변방이 뭐예요?” “강온 양면정책 그건 뭐예요?” “회유하다에서 회유가 뭐예요?” 사건의 시대적 배경이나 인과관계를 알아보기는커녕 어휘 설명만 하다가 시간이 다 흘렀다. 조세, 징수, 감찰, 호구, 풍기 등 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주요 단어 어느 것 하나도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이러니 고등학생의 70%가 6·25전쟁이 북침인지 남침인지 헷갈리는 이유가 사실 어휘력 부족 때문(상당수가 북한이 남한을 침범한 것이 ‘북침’인 줄 알고 있었다)이라는 게 이해가 된다.
10일 박근혜 대통령이 “이렇게 중요한 과목은 평가기준에 넣어야 한다”고 말한 이후 한국사를 대입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최근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가 초중고교, 대학의 교원 1630명을 대상으로 학생들의 한국사 인식 수준이 심각하게 저하된 이유를 물었더니 응답자의 62.9%가 ‘수능에서 선택과목이기 때문’이라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막상 한국사를 수능 필수과목으로 지정하려 하자 다른 사회과 교사들이 반발하고 있다.
2014학년도 수능 사회탐구 영역은 한국사·동아시아사·세계사(역사계열), 생활과 윤리·윤리와 사상(윤리계열), 한국지리·세계지리(지리계열), 사회문화·법과 정치·경제(일반사회계열)까지 총 10개의 선택과목이 있다. 수능에서는 이 중 2과목을 골라 치르는데 만약 한국사가 필수가 되면 나머지 한 자리를 놓고 9개 과목이 경쟁하는 꼴이 된다. ‘시험이라도 쳐야 공부한다’는 논리에서 볼 때 선택되지 못한 과목들은 학교에서도 찬밥 신세일 게 뻔하다. 사회과 교사들의 집단 반발을 밥그릇 싸움으로만 보기 어려운 이유다.
여기서 ‘이렇게 중요한 과목’에 대해 의문이 생긴다. 국어를 잘 못해 어휘력이 달리는 아이들이 역사 수업을 따라가기 힘들 듯, 세계사의 흐름을 모르고서 한국사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을까.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 사람이니까 임진왜란이 일제 시대라고 말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중요한 과목’은 한국사일까, 세계사일까, 아니면 국어일까.
김현미 여성동아 팀장
http://news.donga.com/3/all/20130718/56514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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