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23:40

“인간에 대한 관심과 배려, 그리고 삶에 대한 자기성찰이 깔려 있지 않으면 어떤 발명도, 제도도 괴물이 된다.” 종교 지도자나 철학자가 한 말이 아니다. 지난 10일 대통령과 주요 언론사 논설실장·해설위원실장들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한 언급이다. 박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인문학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관심을 가지고 챙겨가려고 한다”고 했다. ‘괴물’이라는 도발적인 보통명사 하나로 여기에 맞서는 인문학의 현재적 가치를 쉽게 정리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박 대통령은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지만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다. 고교시절 문과 학생이었고, 문예반과 연극반에서 활동했다. 수필집과 자서전 등 7권의 저서를 냈고, 문인협회 회원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이력만으로는 인문학에 대한 그의 남다른 관심을 설명하기 어렵다. 감당하기 어려웠던 비극에 맞서는 과정에서 갖게 된 인간과 세상에 대한 통찰이 숨은 코드였을 것이다. 무연한 고통이 가져다준 역설적 축복이라고나 할까.

1979년 10·26 이후 정치를 시작한 1997년까지 박근혜의 잃어버린 18년은 힘겨웠다. 부모를 차례로 흉탄에 잃고 청춘의 절정인 스물여덟에 청와대를 나온 뒤 거듭된 배신을 겪었다. ‘숨쉬는 것조차 힘들었던’ 절망의 심연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다. 어머니가 다니던 절에도 가고 『법구경』과 『금강경』을 머리맡에 두고 수시로 읽었다. 성심여중고와 서강대 시절에 익숙하게 접했던 가톨릭 교리도 다시 공부했다. 『정관정요』 『명심보감』 등 우리 고전과 동양철학을 섭렵했다. 중국 지식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펑유란의 『중국철학사』를 읽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의 독서 이력이 남다른 것은 되새기고 내면화해 마침내 스스로의 세계관을 축조했다는 점이다. 공개된 19년간의 일기와 수필집, 자서전에는 삶과 인간, 역사에 대한 성찰적 사유,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의 운명에 대처하려는 결연한 마음가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1981년 10월 14일의 일기에서는 “인간에게는 행복만큼의 불행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정신적 영어(囹圄)의 시기를 독서와 사색, 글쓰기로 버텨냈다고 할 수 있다.

일부에서는 자기 세계관이 지나치게 확고한 사람들이 갖는 기질적 문제점을 거론한다. 타자와의 소통에 장애가 발생할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런 우려가 현실로 드러나는 장면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북한의 도발 등 예기치 않았던 상황에도 흔들림 없이 대처하는 초연함은 지도자에게 내면의 깊이가 왜 필요한지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앞만 보고 달리는 살인적 경쟁과 탐욕의 지배를 받고 있는 대한민국의 오늘을 생각하면 “사람답게 살지 않으면 괴물이 된다”는 메시지는 세태를 거스르는 박근혜식 결단으로 받아들여진다.

문제는 ‘괴물’이 아닌 ‘사람’이 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인문학을 어떻게 활용할지가 관건이다. 서울대 김기현(철학) 교수의 권고대로 1997년 미국 클린턴 대통령이 직속기구로 두었던 ‘예술 및 인문학 위원회’의 보고서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이 보고서는 “예술과 인문학의 창조적인 힘은 우리의 민주주의를 건강하게 한다”면서 “예술과 인문학은 명백히 ‘공공재’로 인식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공공재가 무엇인가. 시장을 통하지 않고도 빈부귀천을 떠나 모두가 소비혜택을 누릴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다. 사람과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떠올리면 된다. 몇몇 사람의 교양취미가 아니라 전 국민이 삶의 중심 가치로 향유할 수 있는 인문학의 인프라를 정부가 책임지고 깔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홀대받고 있는 인문학에 대한 지원을 긴급한 국가 프로젝트로 설정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인문정신의 확산은 박 대통령의 핵심 의제인 창조경제에도 든든한 동력이 될 것이다. 지금 세계의 트렌드는 기술력 중심의 지식기반 경제에서 인문학적 창의성이 혁신의 열정을 격발하는 창조경제로 이행했다. 인간의 감성을 중시하는 상상력이 기업과 제품의 성패를 좌우하는 시대가 됐다는 얘기다. 오죽하면 생전의 스티브 잡스가 “소크라테스와 식사할 기회를 준다면 애플이 가진 모든 기술과 바꾸겠다”고 했을까. 박 대통령도 “창조경제시대의 창조는 인간 행동에 대한 끊임없는 관심과 배려에서 나온다”고 화답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한국 사회의 역동성을 억압해온 낡은 틀을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전환할 기회를 맞았다. 경쟁과 성과 일변도의 피로사회를 인간적인 배려와 관심이 우선하는 건강한 사회로 만드는 역사적인 체질개선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괴물’에게 선전포고한 그가 어떤 승부수를 던질지 궁금하다.

이하경 논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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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