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영국 BBC방송에 흥미로운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제목은 '독일 사람 되어보기(Make me a German)'. 옥스퍼드대를 졸업한 경제 담당 기자 저스틴 롤러트(Rowlatt)가 아내, 두 자녀와 함께 독일의 중부 도시 뉘른베르크로 이사해 독일 중산층처럼 살아보는 내용이다.
롤러트 기자는 문구류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에 임시로 취직했다. 독일인 평균 기상 시각인 오전 6시 23분에 일어나고, 주말엔 가족과 함께 축구장에 갔다. 작가 겸 PD였던 아내는 전업주부가 돼 하루 4시간씩 집안일을 했다.
롤러트가 근무한 공장의 노동자들은 평균 오전 7시 49분 출근부에 도장을 찍었다. 영국보다 일하는 시간이 적었지만, 월급은 더 많이 받았다. 그들은 근무시간에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페이스북을 하지 않았다. 사장은 "독일은 연필 같은 단순 제조업에서도 세계 최고"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롤러트의 아내는 거의 분 단위로 계획을 짜서 생활하는 독일 주부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예전 같았으면 영국 시청자들은 재미없기로 세계 1등인 독일인들이 얼마나 무미건조한 생활을 하는지 속으로 비웃으며 이 프로그램을 봤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기획 의도는 달랐다. 독일의 성공 비결을 독일인의 삶 속에서 직접 찾아보겠다는 것이었다. 롤러트 가족은 "영국도 성공하기 위해선 직장에서 휴대전화부터 꺼야 할 것 같다"며 '효율성(efficiency)'이라는 그들 나름의 해답을 제시했다.
요즘 영국에선 새로운 국가 모델을 연구하는 작업이 한창이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우리는 좀 더 독일답게 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앙숙인 독일을 벤치마킹하자는 이야기가 영국 총리 입에서 나온 것이다.
프랑스에서도 이전엔 볼 수 없었던 장면이 있었다. 올여름 프랑스 장관들은 2주일씩 휴가를 갔다. 우리가 볼 때는 여전히 긴 기간이지만, 보통 한 달 가까이 바캉스를 즐기던 이전과 비교하면 확연히 짧았다. 휴가에서 돌아온 장관들은 곧바로 '2025년의 프랑스'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장관들은 휴가 중에도 이 세미나 준비에 매달려야 했다. 바캉스에 목숨 거는 프랑스인에게 비록 장관이라 하더라도 휴가지에서 서류를 뒤적여야 하는 상황은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세미나 내용이 장밋빛 일색이라는 비판이 있긴 했지만, 프랑스 정부로서는 10년 이후 장기 플랜을 논의한 의미 있는 자리였다.
이처럼 경제 위기가 바닥을 쳤다는 신호가 나오면서 유럽 국가들은 '위기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 경기 부양 같은 단기적 처방뿐 아니라 '위기의 승자(勝者)'가 될 수 있는 새로운 국가 모델을 고민 중이다. 영국은 국민의료보험(NHS), 프랑스는 연금 같은 사회 근간을 이루는 핵심 정책에 칼을 대고 있다.
유럽의 저력은 이처럼 큰 그림을 그리고, 이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데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방향의 옳고 그름에 대한 치열한 논쟁도 피하지 않는다. 명백한 오류가 아니고선, 그런 과정을 거쳐 나온 정책을 자기 입으로 하루아침에 뒤집는 일은 없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지금 우리 정부는 과연 어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지 궁금했다. 동시에, 그리고 있기는 한 건지 걱정도 뒤따랐다.
이성훈 파리특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8/25/201308250229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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