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9. 19. 22:59

<악의 투명성>이라는 책에서 장 보드리야르는 우리 시대 문화의 특징으로 ‘긍정성’(positivity·포지티브)을 든다. 우리가 흔히 ‘긍정적’이라고 풀이하는 영어 단어 ‘포지티브’는 원래 ‘결여되지 않은, 존재하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의학에서 ‘포지티브’는 ‘양성반응을 보이는’, 즉 ‘예상하고 있던 특징이 실제로 존재하는’이라는 의미로 쓰인다. ‘긍정적’이라는 단어는 그래서 뭔가로 꽉 차 있는 이미지를 가진다. 우리 사회에서 ‘긍정적인 사람’이 언제나 뭔가를 부지런히 기획하고, 시도하고, 도전하는 인간을 지칭하는 것처럼 말이다.

긍정성에는 결핍이 없으며, 충만함만 있다. 긍정성의 문화는 내가 가진 모든 결핍과 결여를 보충하고, 제거하고, 그래서 결국은 ‘결여 없는 존재’로 나아가려는 욕망으로 추동되는 문화다. 보드리야르는 이러한 긍정성의 문화를 표상하는 이미지로 ‘그림자 없는 인간’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그림자 없는 인간’은 존재 자체를 표백시켜 버린 인간을 의미한다. 단점을 없앨 수 있고, 결여는 채울 수 있다는 믿음, 즉 노력만 한다면 나의 어두운 ‘그림자’를 없애버릴 수 있다는 믿음이 ‘그림자 없는 인간’을 만들어낸다.

긍정성의 문화가 지배적인 곳에서는 여지없이 ‘그림자 없는 인간’이 양산된다. 미용 성형수술의 유행은 대표적인 사례다. 2011년 기준 성형시술 건수 세계 1위인 한국에서 성형수술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신체를 ‘주조’함으로써 내 결여를 채울 수 있다는 믿음의 이름이다. 케이블티브이 프로그램 <렛 미인>의 출연자들은 모두 자기 삶의 현재적 문제가 미의 결여에서 비롯되었다고 믿는다. ‘썩은 가슴’과 ‘주걱턱’을 없앨 때 비로소 남편의 사랑과 가수에의 꿈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는 출연자들은 자신의 온갖 치부를 드러낸 채 의사들의 선택을 요청하며 고개를 숙인다. 이러한 장면들은 거의 ‘종교적’이기까지 하다. 피폐한 삶과 인생에 지친 이들이 의사들 앞에 서서 자신의 고통을 고백하면, 의사는 이들 중 하나를 선택해 그의 삶을 새로이 바꿔낸다. 고통, 믿음, 시험, 통과의례, 그리고 기적과 구원이라는 종교적 서사가 이 프로그램의 포맷을 이룬다.

199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는 형편이 어려운 가족의 사연을 통해 그들의 허름한 집을 고쳐주는 프로그램이 유행했다. 2000년대 이후에는 집중 트레이닝을 통해 성적을 올려주는 프로그램이 생겼다. 그리고 2010년대가 지나면서 신체를 완전히 변화시키는 프로그램이 탄생했다. 집도, 학교도, 이제는 신체의 아름다움에 비하면 영향력이 떨어진 것이다. 이는 제조와 정보를 넘어 몸 자체, 삶 자체를 가공함으로써 이를 ‘시장’으로 삼는 오늘날의 자본주의 전략과도 맞물려 있다. 신체의 강인함과 아름다움이 ‘경쟁력’이라면, 우리는 마땅히 그곳에 ‘투자’하고 그곳을 ‘경영’해서 ‘이익’을 내야 한다. 신체의 그림자를 없애는 시장의 확대는 정신의 그림자를 없애는 시장(자기계발, 힐링)과 결합함으로써 삶 전체의 그림자를 없애는, 즉 완벽한 ‘긍정성’의 문화를 향해 가고 있다.

이 완벽한 긍정성의 문화는 역설적으로 완벽한 부정성의 문화이기도 하다. ‘그림자 없는 인간’은 실체 없는 인간, 곧 시체, 귀신, 혹은 유령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성형한 아름다움이 넘치는 곳, 자기계발의 성실함이 넘치는 우리 사회에서 ‘죽음’의 소식 역시 넘쳐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부정성마저도 긍정할 수 있는 긍정성이 아닌, 더 큰 긍정성을 위해 작은 부정성마저도 제거해버리는 문화는 역으로 감당할 수 없이 거대한 부정성의 역풍을 예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그림자를 없애버린 이 시대는 어쩔 수 없이 파국의 그림자를 불러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01529.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