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에 대한 관심 없이도 윤리적 행동을 할 수 있는가?'
얼마 전 시행된 프랑스 대학 입학 자격시험 바칼로레아의 철학 과목 논제(論題) 중 하나다. 바칼로레아는 단문형의 포괄적 질문을 던져 수험생의 사고력과 지식을 평가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오지선다형과 단답식으로 된 우리나라 수학능력시험과는 완전히 다르다. 지식을 파편적으로 암기하고, 예시된 보기 중 정답을 골라내는 '기술'만 익혀서는 풀기 어렵다. 우리나라에선 고등학생이 아닌 대학생에게 이 논제를 던져도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바칼로레아의 명성은 익히 알기에 이 문제를 보고서 크게 놀라지는 않았다. 오히려 신선했던 건 이 문제를 다루는 프랑스 사회의 모습이었다.
시험이 있던 날 TV 채널을 돌리고 있는데,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푸아투샤랑트 의회 의장인 세골렌 루아얄이 철학과 교수와 함께 이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사회당 소속 루아얄 의장은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의 전 동거녀로 2007년 사회당 대선 후보로 나섰던 유력 여성 정치인이다. 그는 개인적 경험을 거론하며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이야기했다.
루아얄뿐 아니다. 이날 뱅상 페이용 교육부 장관, 우파인 대중운동연합(UMP)의 장 프랑수아 코페 대표, 극우파인 국민전선(FN)의 마린 르펜 등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정치와 윤리의 관계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르펜은 "윤리적이라는 것은 자신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동체의 삶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고, 결국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고 말했다. 최근 프랑스 사회의 핵심 이슈 중 하나인 불법 이민자 등 살아있는 사례들이 거론되기도 했다. 그런 방송과 글을 보며 적어도 이날 하루만큼은 프랑스 사람들이 '정치와 윤리'라는 주제에 대해 나름대로 생각해 보았을 듯싶다.
만약 우리나라 대입 시험이 바칼로레아 같은 논술식이라면 어땠을까? 사회 과목에 이 문제가 나온 저녁에 프랑스와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아닐 것 같다. 대신 이런 장면이 상상이 된다. 인터넷에는 몇 가지 '모범 답안' 유형이 돌아다닐 것이다. 그걸 보며 수험생들은 자기가 쓴 글이 얼마나 '정답'과 비슷한지 맞추어 볼 것이다. 서울 강남의 논술 학원에선 강사들이 루소와 칸트 등 정치 철학자들의 정치와 윤리에 대한 핵심 개념을 외우기 좋게 요약 정리해 줄 것 같다. 곧 수험생이 될 고등학교 재학생은 또 그 기출 문제의 정답을 달달 외운다. 만약 비슷한 문제가 다시 출제된다면, 수험생 대부분이 똑같은 답안지를 적어낼 것이다. 논술은 정답 찾기가 아니라 수험생의 논리적 사고력을 알아보는 것인데도, 우리는 이렇게 정답만 찾는다.
먹고살기 어려운데 정치와 윤리의 관계가 도대체 뭐란 말이며, 철학이 밥 먹여 주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가 좀 더 나아지기 위해선 이런 집단적 성찰과 사색도 때로는 필요할 것이다. 이런 게 진정한 의미의 집단 지성 아닐까? 인터넷에서 내 편, 네 편 가르며 물어뜯는 게 아니고 말이다.
이성훈 파리 특파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7/07/20130707020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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