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말 키프로스에 다녀왔다. 요즘 전 세계를 긴장케 하는 은행 연쇄파산과 국가부도 위기가 표면으로 드러나기 직전이다. 중국인의 키프로스 부동산 투자를 취재하기 위한 출장이었다(중앙SUNDAY 3월 3일자).
그때 본 키프로스는 평온하고 아름다운 지상낙원이었다. 거리에는 야자수와 레몬 나무가 즐비했고, 해안도로변의 코발트 빛 지중해는 그림 같았다.
지난해 기준의 1인당 국민소득은 한국보다 5000달러가량 많은 2만8000달러(약 3100만원). 농사와 관광 말고는 이렇다 할 산업이 없는 곳인데 생활 수준은 꽤 높았다. 제주도 면적 다섯 배 크기의 섬에 제주도 인구 두 배 정도가 살고 있으니 북적거림도 없었다. 주민들은 친절하고 여유가 있었다. 왜 유럽의 은퇴자들이 몰려드는지 단박에 이해가 됐다.
풍요의 비결은 외국 돈이었다. 해안의 고급 빌라들은 대개 외국인 소유였다. 러시아·영국 부자의 별장이 많았다. “한국의 변호사 미스터 킴이 몇 년 전에 산 빌라”라며 부동산 업자가 외관을 구경시켜 준 곳도 있었다. 최근의 사태로 널리 알려졌듯 키프로스 은행 예금의 절반 이상은 외국계 자본이다. 대부분 러시아 사업가들이 거래 편의나 재산 보호를 위해 예치한 돈이거나 유럽 은퇴자들이 들고 온 노후자금이다. 유럽연합(EU) 소속에 유로화를 쓰는 나라면서 세율은 낮다는, 외국 돈이 몰려들기에 좋은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그곳에서 만난 프랑스 이민자는 “프랑스에서는 연금의 40%가 세금으로 날아가지만 여기서는 5% 정도만 세금으로 내면 된다”고 말했다.
부러웠다. “한국에도 외국 돈이 쏟아져 들어오면 금세 국민소득 3만~4만 달러의 나라가 될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마침 한국에 중국계 자본이 대거 유입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발상의 위험성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주 뒤 키프로스 경제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다. 외국 돈으로 비대해진 금융·부동산 산업이 그리스발 위기에 전염되면서 구제금융에 의존해야 하는 상태가 됐다.
노무현 정부 말기 한국을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구상이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도 당선인 시절 인수위에 해외 자본 유치를 위한 특별위원회를 만들어 영국 금융인을 위원장에 앉히기도 했다. 곧바로 불어닥친 미국발 금융위기로 금융 허브의 꿈이 좌절된 것을 한국의 행운으로 보는 경제인들도 있다. 2년만 늦게 금융위기가 발발했다면 ‘제2의 IMF 사태’를 겪었을지 모른다는 얘기다.
외국 돈이 몰려든다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그만큼 외부의 위기에 취약해진다. 키프로스에 앞서 아이슬란드·아일랜드·스페인이 약한 산업적 기반 위에 비대한 금융업을 올려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생생히 보여줬다. 역시 일해서 번 돈이 제일 값지고 든든하다.
이상언 런던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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