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초강대국 미국은 범죄에서도 대국이다. 미국의 엄청난 힘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미래를 부정적으로 보는 데는 범죄 요인이 상당히 크다. 역설적인 것은 범죄의 상당 부분이 미국을 상징하는 다양성에서 기인한다는 점이다. 백인의 유색 인종에 대한 차별과 편견은 고착화한 지 오래여서 이제는 더 나빠지지 않게 하면 다행일 정도가 됐다. 전세계에서 인종차별이 가장 광범위하게 자행되는 나라가 미국일 것이다.
미국의 치안이 어느 정도인지는 쉽게 체감할 수 있다. 미국 사람은 밤 9시 이후에는 웬만하면 밖에 나가지 않는다. 도심 밤거리를 혼자 걸어 다니는 사람은 잠재적 범죄자이거나 이런 사실을 모르는 이방인일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한국동포에 대한 약탈로 기억되는 1992년 로드니 킹 흑인폭동은 미국 경찰에게는 범죄 수사를 수십 년 퇴보시킨 치욕적인 사건으로 기록됐다. 정지 명령을 무시하고 도망치던 흑인 킹을 붙잡아 경찰봉 등으로 무차별 폭행한 백인 경찰들은 과잉진압 혐의로 기소됐지만 사건 발생 1년여 만에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났다. 무죄 결정을 내린 12명의 배심원 중에 백인은 10명, 히스패닉과 아시아계가 각 1명이었고, 흑인은 한 명도 없었다.
불공정한 재판의 대가는 혹독했다. 흑인들의 유혈폭동으로 로스앤젤레스는 불길에 휩싸인 무법천지로 변했다. 54명이 사망하고 수 천명이 다쳤다. 재산피해는 10억 달러에 달했다. 오죽했으면 LA 경찰에 사람을 해치지 않으면 단순 약탈자는 건드리지 말라는 지시가 내려졌을까. 어찌 보면 미국 경찰의 업보일 수도 있다. 필요 이상의 과잉 대응으로 흑인 용의자를 사살하고, 검거율을 높이기 위해 죄 없는 흑인을 범죄자로 모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으니 말이다. 괴물을 잡으려다 스스로 괴물이 된다는 말은 미국 경찰들 사이에서 푸념조로 유행하는 말이다.
흑인폭동 사건 이후로 과거 같았으면 범죄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로 인정됐을 것들이 법원에서 기각되는 사례가 많아졌다. 인종적 편견이 수사과정에 개입됐을지 모를 가능성 때문이다. 소수 인종들의 험악한 사회적 분위기도 작용했을 것이다. 민권변호사들 사이에서는 수사와 재판이 킹 사건 이후 확연히 달라졌다고 해서 'BK(Before King)'라는 신조어가 유행할 정도지만 그에 맞춰 미국의 거리가 범죄에 더 취약하게 된 것도 부인할 수 없다.
로드니 킹 사건이 극적으로 미국의 범죄수사에 영향을 미친 것은 2년 뒤 발생한 O J 심슨 사건이었다. 명예의 전당에도 이름을 올린 미국 흑인 미식축구의 영웅 심슨은 94년 백인 부인과 부인의 백인 남자친구를 무참히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지만 결국 무죄로 풀려났다. 심슨의 집에서 부인의 피가 묻은 장갑이 나오고, 심슨과 부인의 혈흔이 발견되는 등 결정적 증거가 제시됐지만 심슨은 웃으며 법정을 나왔다. 이유는 하나, 심슨은 흑인이고 그를 체포한 경찰은 백인이라는 점 때문이었다. 변호인단은 LA 백인 경찰 마크 퍼먼이 심슨을 체포하면서 'nigger(검둥이)'라고 한 것을 집중적으로 물고 늘어졌다. 백인 경찰의 신뢰를 깎아 내리려는 이 전략은 대성공을 거둬 여러 증거물들은 경찰이 심슨을 옭아매려고 사전에 심어둔 것으로 치부됐다. 배심원단은 로드니 킹 사건 때와 정반대로 흑인이 무려 9명, 백인은 3명 뿐이었다. 로드니 킹 사건이 없었다면 심슨은 풀려났을까. 또 지금처럼 범죄자가 피부색을 앞세워 법을 비웃으며 거리를 활보하는 일이 가능했을까.
미국 얘기를 장황하게 한 것은 한국도 범죄의 양태가 '고도화'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얼마 전 한국의 살인범죄 발생률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9개 회원국 중 9번째로 높았고, 성폭력 등은 OECD 평균보다 최대 200% 높았다는 한국개발연구원(KDI)의 보고서가 나왔다. 지난해 말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은 한국인 대다수가 사회ㆍ경제적 지위에 따라 법집행이 차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범죄를 줄이는 길은 공권력의 신뢰에서 나온다는 것을 미국의 사례에서 배웠으면 한다.
황유석 국제부 부장대우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3/h20130328212808244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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