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부터 제주도의 공무원이나 기자를 만날 때마다 질문한 게 있다.
"강정마을 주민 1500여명의 절반 정도가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한다는데, 이제 그 숫자가 줄어들지 않았느냐"고. 대답은 거의 언제나 "변동 없다"였다.
이해되지 않았다.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법적·행정적·정치적 절차가 장애물을 하나씩 넘어가며 해군기지를 건설하는 방향으로 더디게나마 흘러가고 있었고, 국민이나 제주도민 여론도 기지 건설에 찬성하는 쪽이 많았기 때문이다. 보상에 불만 가진 사람도 거의 없다고 했다. 기지가 건설되면 강정마을이 누리는 경제 효과도 상당히 큰 것으로 추산됐다. 제주도에 흔한 종류의 바위와 붉은발말똥게 같은 자연을 지켜야 한다거나, 해군기지가 미군 기지화해 중국의 공격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외부 세력의 설득력 약한 주장에 주민이 동의하고 있다고도 생각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기지 반대 주민이 지금까지 줄지 않는 이유는 뭘까.
수년 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이 의문은 얼마 전 한 제주 토박이의 설명을 듣고 좀 풀렸다. 문제는 찬성·반대 주민 사이에 생긴 깊은 '감정의 골'이라 했다. 외부 세력이 개입해 허위 사실로 선동한 뒤부터 폭언과 폭력이 주민 사이에 횡행했고, 누가 찬성파이고 반대파인지 보이지 않는 꼬리표가 달려 두 패로 좍 갈렸다는 것이다. 뜻이 다른 이웃·친척·가족이 말을 섞지 않았고, 낫을 휘두르는 경우도 생겨났다. 어느 것이 옳고 유리한지에 대한 판단은 의미가 없어졌고, 생각을 바꾸는 것은 배신으로 몰리게 됐다. 그 어떤 상황 변화가 와도 입장을 바꾸지 못하는 덫에 모두 빠진 것이다. 이런 상황이면 해군기지가 건설되고 마을이 멋지게 발전한다 한들 절반은 '어디 잘되나 보자'며 돌아앉아 있을 것이고, 그것을 의식하는 나머지 절반의 삶도 피곤할 수밖에 없다.
매년 시위와 소송, 국회의 예산 삭감 등 탓에 롤러코스터 신세였던 제주 해군기지 건설 사업은 올해부터 순항하기 시작했다. 외부 세력의 시위는 미약해졌고, 국회의 요구 사항을 모두 반영하는 방향으로 정부 부처와 제주도가 얼마 전 합의함으로써 예산도 순조롭게 지원되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새로이 힘을 쏟아야 할 일은 강정마을의 극단적 갈등을 치유하고 교훈을 찾는 일이다.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은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가 나서야 한다. 심리 상담가들은 주민의 거칠어진 마음을 다독여주고, 심리학·사회학·인류학자들도 마을에 들어가 해결 방안을 연구해봐야 할 것이다.
제주도민 사회도 이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국민 통합을 기치로 내건 새 정부가 주요 과제로 삼고 나서는 것도 좋을 것이다. 강정마을은 갈등이 거칠게 충돌하는 우리 사회의 극단적 단면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전국에서 크고 작은 지역 단위로 중요한 의사 결정을 해야 하는 일이 많을 것이다. 강정마을 사태의 전 과정을 백서로 만들고, 이를 통해 주체적 비폭력적 민주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는 방법을 함께 연구하고 익혀보자. 미래를 위해 이를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도 좋을 것이다.
박중현 사회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3/25/2013032502185.html
'교양있는삶 > 사설 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편집국에서/3월 29일] 미국 공권력의 비극 (0) | 2013.04.10 |
---|---|
[편집국에서/3월 26일] 다시 중국이 기회다 (0) | 2013.04.10 |
[김성윤의 맛 세상] '양념 치킨'도 이제 한국 대표 음식이다 (0) | 2013.04.10 |
[서화숙 칼럼/3월 29일] 당신은 그렇게 유능하지 않다 (0) | 2013.04.06 |
[특파원 칼럼] 뉴욕, 2013년 겨울 (0) | 2013.04.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