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설 연휴, 고향에 다녀들 오셨는지. 그렇다면 올해도 똑같은 느낌을 받은 분이 많을 것이다. 고속도로 휴게소야 원래 그렇다 치고, 국도변에 다닥다닥 자리잡은 음식점 간판들이 어찌 그리 다 한통속인지 말이다. 토종닭백숙·국밥·설렁탕·매운탕·장어구이…. 전국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원조’ 아니면 ‘할머니 손맛’을 내걸었다. 그 많은 할머니 명인이 돌아가시지도 않는다. TV 프로그램에 나왔다며 방송사 로고를 붙인 집이 너무 많아서 안 그런 집 찾기가 더 힘들 지경이다.
차를 세우고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 식사를 하면 십중팔구 실망이다. 조미료를 듬뿍 친, 그저 그런 맛이다. 반대로 유명하다는 맛집을 애써 찾아가면 줄을 길게 선 끝에 뒷손님 눈치 보며 후딱 먹어치워야 하는 불편이 따른다. 그래서 대한민국 식당은 두 종류다. 소수의 ‘얻어먹는 집’과 다수의 ‘먹어주는 집’이다.
나를 포함해 절대다수 장·노년층은 질보다 양 위주의 식습관에 길들여져 있다. “진지 드셨습니까”라는 인사말에 배고픈 역사가 숨어 있다. “먹는 게 남는 것” “먹다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고 외치며 미각보다 포만감, 혀보다 위장을 앞세웠다. 음식 취향은 개인사(史)를 정확히 반영하기 때문에 나중에 형편이 풀렸다 해서 입맛까지 고급으로 바뀌지 않는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 유배 시절 툭하면 부인에게 편지를 보내 그 비싼 민어·어란과 쇠고기·조기젓·수수엿·호두·곶감을 보내달라고 어린애처럼 졸랐다. 권문세가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좋은 먹거리를 두루 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고기도 먹어 본 놈이 먹는다고 했다.
베이비부머 이상 세대야 어쩔 수 없다 치자. 그러나 다음 세대까지 지금의 척박한 외식문화를 물려주어서야 되겠는가. 사실 우리에겐 1980년대까지 이렇다 할 외식문화가 없었다. 대다수가 집에서 만든 밥과 반찬으로 때웠다. 외국계 프랜차이즈 식당이 국내에 진출한 게 80년대 중반이었다. JTBC ‘미각 스캔들’에 출연 중인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씨는 “우리에겐 향토음식을 상품화해 본 경험이 없다”고 말한다. 산업화 과정에서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이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지자 어릴 때 고향에서 먹던 음식을 찾은 게 향토음식 개발의 계기였다. 농촌 아니라 도시의 요구로 시작됐다는 얘기다. 축적된 경험이 없으니 이웃 닭백숙집이 잘되면 닭백숙, 매운탕집이 잘되면 매운탕을 너도나도 차려내기 시작했다. 얼마 안 지나 그저 그런 비슷한 먹거리가 전국을 뒤덮었다.
천편일률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황교익씨는 가장 시급한 과제로 식재료의 DB(데이터베이스)화를 꼽는다. 어느 고장에서 무슨 농수산물이 나고, 특성은 어떠하며, 어떤 경로로 구할 수 있는지 세세히 정리하는 게 먼저다. 유럽·일본에선 이미 20~30년 전에 끝낸 작업이다. 농수산식품유통공사의 염대규 식품산업처장에 따르면 그나마 올해 최초로 식재료 DB 구축을 위한 실태조사 예산이 소액 배정됐다. 재작년 제정된 외식산업진흥법 덕분이다.
전문가들은 식재료를 체계화해 놓지도 않고서 한식 세계화를 외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본다. 서울 이태원에 퓨전한식 레스토랑을 차려 주목받고 있는 젊은 셰프 권우중(33)씨는 “요리는 곧 문화인데, 한식이랍시고 만날 비빔밥·잡채·불고기만 돌려대면 앞으로 이삼십 년이 지나도 태국요리 이상의 취급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걱정했다. 프랑스·중국·일본·이탈리아 같은 요리대국 대접은 까마득하다는 말이다. 음식을 미리 만들어 냉장고에 두었다가 꺼내 상을 차리는 시중의 한정식은 “최악의 요리”라고 권씨는 비판한다. 중국은 간단한 면 요리부터 만한전석(滿漢全席)까지, 일본은 덮밥에서 가이세키(會席)요리까지 대중성과 수월성을 골고루 구비했다. 요리의 생태계가 살아 있다. 한식은 어림도 없다. 권 셰프는 “더 심각한 문제는 프로 한식 요리사, 특히 젊은 요리사가 너무 없다는 점”이라고 말했다. 세계화? 남들이 먹어주고 각국 요리사가 다투어 한국 재료로 음식을 만들어야 세계화다. 민족주의 냄새가 풍기는 지금 방식으론 안 된다. 런던 올림픽에서 금메달 8개를 한국·스페인·터키·아르헨티나 등 8개국이 사이 좋게 나눠 가진 태권도가 올림픽 핵심 종목으로 살아남은 것과 같은 이치다.
이제 식당도 할머니 손맛과 이별할 때가 됐다. 주먹구구식 획일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갖춰야 한다. 잔뜩 차려놓았는데 막상 먹을 건 없는 상차림은 과감히 엎어버리자. 음식을 즐기는 게 아니라 허겁지겁 ‘집어넣는’ 안쓰러운 모습을 우리 아이들에게까지 유전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노 재 현 논설위원·문화전문기자
http://articl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0678148&ctg=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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