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 들른 김에 바티칸시티에 갔다가 눈여겨본 게 있다. 현금자동지급기 모니터에 뜬 사용 안내문이 라틴어로 돼 있었다. 그림 안내가 함께 떠서 얼추 불편하지는 않았다. 영국 어떤 도시는 지하철 금연 문구가 영어와 라틴어로 쓰여 있다. '노 스모킹/ 놀리 푸마레(Noli Fumare)'. 1파운드 동전엔 라틴어로 '엘리자베스, 데이 그라티아 레지나 피데이 데펜소르'라고 쓰여 있다. '신의 가호로 믿음을 지키는 여왕'을 기린다.
▶흔히 '죽은 언어'라고 하지만 라틴어는 그네들 일상에 살아 숨 쉬듯 스며 있다. EU의 좌우명은 '인 바리에타테 콘코르디아(다양함 속에 하나가 된)'다. 핀란드에는 라틴어 방송도 있다. '로빈슨 크루소' '보물섬' '어린 왕자' '해리포터' 같은 어린이 책도 꾸준히 라틴어로 번역한다. 라틴어로 시를 짓거나 산문도 쓴다. 예수를 그린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2004)는 모든 대사를 라틴어로 했다.
▶지난 11일 교황이 라틴어로 된 사임 발표문을 읽었다. 교황청 기자들은 서로 멀뚱멀뚱 쳐다보며 통역을 기다렸다. 라틴어에 능숙한 이탈리아 여기자 지오반나 치리의 눈이 빛났다. "너무 피곤하다. 그만두려 한다"는 교황 말씀을 알아듣고 곧바로 140자 남짓 1보(報)를 타전했다. 초를 다투는 보도 현장에서 터진 세계적 특종이다. 그녀가 교황청 취재를 잘해보려고 라틴어를 익혀 온 덕분이었다.
▶부활절에 교황이 성베드로 성전 발코니에서 라틴어로 하는 강복(降福)을 '우르비 에트 오르비(Urbi et Orbi)'라고 한다. '로마 도시와 전 세계에'라는 뜻이다. 그러나 2000년부터 라틴어는 바티칸 공용어가 아니다. 라틴어를 모르는 젊은 사제가 많아진 탓이다. 그러다 전통을 중시하는 베네딕토 16세가 교황에 오른 2005년부터 라틴어 사용이 늘었다. 라틴어 문서와 발표문을 만드는 '라틴어 문서실'이 따로 있다.
▶미국 명문대 교훈은 대부분 라틴어다. 서울대 배지에도 '베리타스 룩스메아(진리는 나의 빛)'라고 쓰여 있다. 서양에서는 중·고교부터 라틴어를 가르친다. 대학에 가려면 라틴어 인증 시험을 치른다. 여러 학문과 문화의 뿌리를 이루는 공통분모가 라틴어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법학·의학·신학·문학·사학·철학은 물론 자연과학도 중요 개념과 용어를 라틴어로 쓴다. 세상 언어는 7000개가 넘는다. 그 대부분은 지금 쓰지 않는 '불 꺼진 언어'가 됐다. 그러나 라틴어만은 정신문화의 꺼지지 않는 불로 빛나고 있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02/14/201302140296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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