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일치 <한겨레> 1면에는 ‘미국 대선 흔든 여성의 힘’이라는 기사가 큼지막하게 실렸다. 전통적으로 투표율이 높았던 늙은 백인 남성들이 퇴조하고, 젊은 여성들이 대거 투표장으로 몰려간 게 오바마 당선의 배경이라는 내용이다. 한겨레만 유독 이 기사를 비중 있게 다룬 데에는 편집국장의 이 한마디가 있었다. “내가 딸을 키워보니 여자가 더 우수한 거 같아.”
오래전 김선주 선배(바로 그 명칼럼니스트!)한테 들은 얘기가 떠올랐다. 일본 고지마섬의 원숭이들은 원래 고구마를 흙이 묻은 채 먹었는데, 한 젊은 암컷이 바닷물에 씻어 먹기 시작했다. 다른 암컷들이 따라 배우더니, 나중에는 섬 전체로 퍼졌다. 그런데도 늙은 수컷들은 끝까지 씻어 먹지 않더라는 것이다. 젊은 암컷의 적응능력과 늙은 수컷의 고집불통을 대비시킨 것이다.
여성들의 집단적인 힘이 세상을 바꾼 사례는 많다. 빅토리아 시대에 젊은 남성들이 식민지를 찾아 떠나다 보니, 영국에는 50만명의 ‘잉여 여성’이 생겨났는데, 그 숫자 때문에 여성 재산권, 여성 참정권, 여성의 대학 입학 같은 법이 만들어졌다. 딸이 부모에게 미치는 영향도 크다. 미국에서는 딸을 둔 하원의원이 낙태를 지지하는 경향이 높고, 딸이 많을수록 투표 전력이 더 진보성향을 띠는 것으로 조사됐다. 독일에서는 소속 정당을 바꿀 경우, 아들이 하나 있는 부모 중 3분의 2는 우파 쪽으로 이동한 반면, 딸을 하나 둔 부모 가운데 3분의 2는 좌파 쪽으로 움직였다.(맬컴 포츠 <전쟁 유전자>)
일반적으로 여성들이 다른 여성과 연대하고 소통하며 사회복지를 지지하는 경향이 크다는 게 대체적인 연구 결과다. 아마도 사바나에 살던 선조 여성들이 함께 채집을 하고 자식들을 돌볼 때, 수다를 떨면서 정서적 유대를 형성했던 적응이 유전자로 이어진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여성이라고 다 평화적이고 진보적인 건 아니다. 이건 어느 외교관한테 들은 얘기인데, 파푸아뉴기니를 가보니 코밑에 수염이 난 원주민 여자들이 제법 되더란다. 그 이유를 알아보니, 극도로 자원이 부족한 환경에서 서로 약탈을 일삼다 보니, 여자들도 전쟁에 나서게 되고 그 결과 남성 호르몬이 분비되면서 수염이 난다는 것이다. 그러니 생애 자체가 전쟁이었고, ‘불통’ 이미지에 갇힌 박근혜 후보가 ‘여성 대통령’을 주창하는 것은 왠지 아귀가 맞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경우, 여성이 남성보다 더 진보적이라는 지표는 없다. 그러나 이제 변화의 시점이 오지 않았나 싶다.
88만원 세대가 다 어렵다지만 특히 여성 청년층의 비정규직 비율은 남성 청년층보다 훨씬 높다. 옛날에는 시집이라도 갔지만, 요즘은 남자들도 약아서 맞벌이만 찾는다. 설사 어렵게 취직하고 결혼을 했다 하더라도, 애 키우고 집안일 하느라 직장에서 남자 동기들에게 밀리기 십상이다. 그게 싫으면 ‘독한 것’이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한다. 그러니 무슨 구국의 강철대오 같은 신념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엉겁결에 떠밀려 결혼 파업, 출산 파업에 동참하게 되는 경우가 흔하다. 물론 여성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시대 젊은 여성들에게 걸리는 부하는 그 윗세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단군 이래 처음으로 남자들한테 밀리지 않는 교육을 받았고, 학교 다닐 때 성적은 훨씬 좋았기에 그 박탈감이 더 큰 것이다.
일찍이 엥겔스는 ‘인류의 모든 혁명은 여성해방을 동반한다’고 말했다. 그러니 우리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가 가장 응축된 젊은 여성들이 먼저 떨치고 일어섰으면 한다. 미국 대선처럼 모두 다 투표장으로 몰려가 낡은 질서를 뒤엎어보라는 것이다.
김의겸 정치·사회 에디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600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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