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인지 고등학교 때인지 정확하게 기억은 하지 못하지만 한문 수업 시간에 배운 고사성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양약고구(良藥苦口) 이어병(利於病), 충언역이(忠言逆耳) 이어행(利於行)'이다.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 이롭고, 진실된 말은 귀에는 거슬리나 행실에는 이롭다는 뜻이다.
요즘 이 고사성어가 특히 다가오는 이유는 왜일까. 아마도 온통 주위에 '쓴 약'이 아니라 '달콤한 약'만 넘치고, 진실된 말보다는 허황된 공약(空約)만 난무하기 때문일 것이다. 많은 선출직들이 표와 인기만 얻을 수 있다면 유권자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넘어 아양을 떠는 수준이 된 것이 요즘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대선공약 중 포퓰리즘으로 보이는 것도 너무 많다. 세 명의 유력 대선후보가 제시한 복지 분야 주요 공약만 모두 26개라고 하는데, 전문가들은 그 중 실현 가능성이 있는 공약을 10개 정도에 불과하다고 본다. 이러다 보니 미국의 유력 일간지 월스트리트 저널은 10월 "한국의 어떠한 대선 후보도 한국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킬 방법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고, 이들 모두 대학 등록금 인하나 복지 확대 등 소소한 문제를 주요 정책으로 내세우고 있다"고 비판했다. 유력 대선 후보들이 국가경영에 관한 거시적이고 웅대한 비전 제시와 이를 실현하기 위해 필요한 노력 및 고통분담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고 도리어 지엽적이고 달콤한 공약만 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유권자들이 무책임한 공약에 휘둘리게 되면 그 결과는 냉혹하다는 것이 선진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프랑스의 올랑드 대통령은 대기업 법인세를 35%까지 올리고, 연 100만유로 이상의 고소득자에게는 세금을 75%까지 부과했지만, 연금수령 연령은 62세에서 60세로 환원시켰다. 정부가 기업들에게는 부담을 주지만 대중의 인기는 얻을 수 있는 포퓰리즘 정책을 밀어붙인 결과는 기업들의 신규 투자 축소와 대량감원이다. 결국 프랑스의 실업률은 13년 만에 최고이고, 공공부채는 이미 국내총생산(GDP)의 91%까지 늘어났다.
2009년 선거에서 일본 민주당은 소위 '무상복지 공약'으로 정권 교체에 성공했지만, '고속도로 무료화'나 '최저연금제 도입' 같은 공약은 사실 황당한 것이었다. 연금 납부와는 상관없이 은퇴자에게는 누구나 월 최저 7만엔의 연금을 보장하겠다는 공약의 실현이 도대체 가능하겠는가. 고속도로 무료화는 부분적으로라도 그 시행을 강행했지만, 결국 1조엔이 넘는 비용 때문에 작년에 폐지했다. 소득과 무관하게 중학생 이하 아동에게는 월 2만 6000엔을 지급하겠다는 '아동수당' 공약 역시 예산 부족으로 공약한 금액의 절반인 1만3000엔을 지급하다 결국 소득제한제 카드를 들고 말았다.
국내총생산(GDP)의 200%를 넘는 국가 부채 때문에 국제 신용평가기관으로부터 신용등급을 계속 강등 당하는 일본에서 '무상복지' 공약의 실현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늘어나는 부채로 인해 무상복지 공약을 대부분 포기한 일본 민주당 정부가 도리어 소비세를 5%에서 10%로 인상하기로 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아르헨티나를 포퓰리즘 천국으로 만들어 결국 재정적으로 골병을 들게 한 장본인 에바 페론의 묘비에 쓰여 있다는 묘비명 '아르헨티나,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는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노래 제목이다. 하지만, 만성적자에 허덕이고 있는 아르헨티나에서 이 묘비명은 '아르헨티나, 아직도 그녀 때문에 울고 있다'로 바뀌어야 할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당장 유권자들 입에 '쓴 약'이지만, 자신이 옳다고 믿는 국가 시스템을 구체적 공약으로 개발해 신념을 갖고 설득하는 대선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올바른 정책이라면 '쓴 소리'도 서슴지 않는 참모를 중용하고, '달콤한 정책'만 권유하는 측근을 멀리하는 대선 후보를 선택해야 한다. 우리 사회 약자의 분노를 교묘하게 악용하지 않는 후보, 이 어려운 시대를 헤쳐 나갈 처방전을 '쓴 약'으로 쓰고자 하는 용기 있는 후보를 기대한다.
이창원 한성대 행정학과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1/h20121106210029243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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