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이란 마천루·GNP 아니라 편안함 속 자유롭게 숨 쉬는 곳
대선 공약, 당장 실천 가능하고 소중한 생명과 꿈을 보호해야…
영리하고 부지런한 국민과 함께 미래로 걸어갈 역량 누가 가졌나
늦가을 세찬 바람에 낙엽들이 우수수 한쪽으로 쏠려간다. 일사불란(一絲不亂)과 만장일치를 보는 것 같아 섬뜩하다. 하지만 바람의 속도 속에 나뭇잎이 쏠려가는 풍경은 순간 아름답기까지 하여 그 속에 내재한 폭력성도 잊고 한동안 그것을 바라본다.
낙엽 지는 풍경에서 존재나 시간에 대한 성찰이 아니라 전제주의를 읽는 것은 머지않아 다가올 대선 탓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의 한 표(票)가 낙엽처럼 바람에 쏠려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카드섹션과 매스게임을 보며 감탄보다는 그 일사불란함 속에 소중한 개성과 존재 하나하나가 갖는 생명의 경이로움이 매몰되어 버리는 것을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래서 요즘 대선 앞에 일어나는 다소의 소요와 격론을 다양성의 즐거움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려 한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대통령의 모습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송년(送年)의 밤' TV에 나와 전국 어린이에게 동화를 읽어주는 대통령이었다. 그는 '나이 든 사람, 지혜로운 사람(Old man, Wise man)'이라는 구호를 들고 70세에 대통령에 당선한 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었다. 그때 우리나라 대통령은 밤 9시면 어김없이 TV 뉴스에 나와 두렵고도 위압적인 목소리로 군대식 명령 언어를 권위적으로 구사했었다. 선진국이란 마천루나 GNP의 수치가 아니라 바로 이런 쉽고 편안함 속에 사람들이 자유로이 숨 쉬며 사는 나라라는 것을 절실히 느꼈었다. 가난한 유학생이 부족한 영어로 그날 밤 들었던 대통령의 동화는 지금까지 어느 정치가의 명연설보다도 더 깊게 각인되어 있다.
그때 마침 옆집에는 베트남전에서 부상당한 참전용사가 살고 있었는데 전담 간병인이 어찌나 세심하게 돌보는지 '한 국가의 자존심을 이렇게도 키워 나가는구나' 하는 것을 또한 절절히 느꼈다. 참담하게 끝난 베트남전의 후유증을 미국은 그렇게 치유 극복하고 그 영예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최근 거듭 발표되는 대선 후보들의 정치 쇄신안이나 선심성 공약 등을 보며 나는 동화를 읽어주던 노(老)대통령과 그 참전용사를 떠올려 보곤 한다.
가장 좋은 공약은 소중한 생명과 꿈을 보호하고 사랑하는 것이 그 근간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실천을 유기적인 구조로 어떻게 잘 푸느냐 하는 것이 복지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대선 공약들은 거대한 명제나 혁신을 내세우기보다 좀 더 인간의 기본적인 삶에 밀착한 구체적이고 실천 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가령 나라 위해 싸운 군인, 불 끄다 희생당한 소방관, 범죄와 싸우다 순직한 경찰을 끝까지 돌볼 수 있는 진정 어린 대책과 파랗게 언 시장 상인의 손을 녹여주고 자살을 생각할 만큼 큰 좌절에 빠진 젊은이에게 꿈을 주는 정책이 필요하다. 그리고 음식물에 유해 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철저히 관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 포함되기를 바란다.
대학과 학문의 질(質) 저하가 불을 보듯 뻔한데 반값 등록금을 그냥 외쳐선 안 된다. 치열한 국제 경쟁 속에서 우리 인재들이 어떻게 살아남을까를 제시하는 대책이 먼저 있어야 한다. 아직 사회적 타자인 여성 문제도 좀 더 앞선 감각으로 다룰 필요가 있다. 예술을 사랑한다며 애국적인 시 한 편을 외고 이미지를 높이려 하기보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연인을 위한 시를 이해하는 문학적 안목과 대중 앞에 그것을 자신 있게 읊을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면 좋겠다.
언뜻 우리나라는 엉성하고 서툴고 부패의 얼룩이 도처에 묻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훨씬 더 많은 사람이 정직하고 깊이 있는 삶을 위해 열정을 다하고 있다. 수많은 교사가 최선을 다해 맑은 눈동자들을 키우고 있으며 대학 도서관은 밤늦도록 불을 밝히고 있다. 한국은 이제 상당한 에너지를 내부에 지닌 국가가 된 것이다. 늦은 저녁 인문학 특강에 가보면 정말 많은 사람이 강의실을 가득 메우고 있어 '이 사회의 동인(動因)이 바로 여기 있구나'라고 감탄하게 된다. 이미 상당한 성공을 이룬 각계의 전문인들이 상상력과 창의력의 가치에 다시 귀를 기울이고, 사려 깊은 존재로서의 삶을 성찰하려고 애쓰는 모습은 정말 흐뭇하다. 이 나라의 저력은 정치가가 만든 것보다 부지런하고 영리한 국민이 피땀으로 쟁취한 것이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문제는 이 영리하고 부지런한 국민과 함께 미래를 걸어갈, 국민보다 조금 더 영리하고 명민한 역량을 지닌 대통령이 누구일까 하는 것이다. 가을바람에 또 한 잎 낙엽이 진다. 저마다 제 빛깔로 이 계절을 풍요롭게 만드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답게 눈에 들어온다.
문정희 시인·동국대 석좌교수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7/2012110701135.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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