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인근 애플스토어에 나가 새로 나온 아이패드 미니를 만져보았다. 예전보다 크기만 작아지고 새로운 혁신은 그리 없다고 느낀 제품이지만 세계적으로 큰 성공을 거둘 것은 분명해 보였다. 아이패드 미니는 올해 미국에 홍수처럼 쏟아져나온 태블릿 컴퓨터들의 대미를 장식하는 제품이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서피스 태블릿, 윈도폰, 구글의 넥서스 시리즈, 아마존의 킨들 시리즈, 삼성의 갤럭시 시리즈 등 전세계를 뒤덮어가는 첨단기기의 행진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다.
나는 인터넷업계에서 일하기도 하거니와 첨단기기를 사서 직접 써보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기에 새롭고 혁신적인 제품이 나오면 일부러 무리해서라도 사서 써보는 편이다. 그런 나도 이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새로 나오는 스마트 기기의 융단폭격에 피곤을 느끼고 있다. 사서 쓴 지 몇 달 지나지 않은 첨단기기도 금세 구형으로 전락하는 세상이다. 게다가 이미 집에 있는 티브이, 랩톱컴퓨터, 태블릿컴퓨터, 스마트폰까지 해서 스크린이 10개가 훨씬 넘는다. 그러다 보니 4명의 가족이 대화 없이 각자 자기만의 화면을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경우가 많다.
스마트 기기를 통해 편리하게 소비하는 콘텐츠도 실은 피로를 가중시킨다. 앱만 실행하면 공짜이거나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볼 수 있는 영화·드라마가 사방에 널려 있다. 사놓고 읽지도 못하는 전자책이 내 스마트 기기 속에 잔뜩 들어 있다. 엄청난 양의 신문·방송 뉴스도 터치 몇 번이면 스마트 기기로 다 볼 수 있다. 트위터와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지인들이 추천해주는 좋은 정보는 얼마나 많은가. 꼭 읽어봐야겠다고 별마크를 해놓았다가 못 읽고 그냥 넘어가는 글이 한두 개가 아니다. 읽고 싶어서 사놓은 좋은 책들도 끈기를 갖고 읽지 못하고 중단해버린 경우가 많다. 그리고 그것들은 고스란히 마음속에 부담으로 남는다. “시간이 없는 것이 한”이라는 말을 되뇐다. 이처럼 나는 정보의 풍요 속에서 생활하며 오히려 깊이 알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정보 편식자가 돼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고민을 하곤 한다.
예전엔 이런 고민이 없었다. 콘텐츠가 희소했기 때문이다. 20여년 전을 돌이켜보면 아침마다 구독하던 조간신문을 처음부터 끝까지 여유롭게 읽었다. 신문광고에서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고 동네서점에 들렀는데 마침 없어서 주인아저씨에게 주문해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었다. 그리고 일주일 만에 구매한 책을 아껴서 음미하며 읽곤 했다. 티브이에서 주말의 명화 시간에 보고 싶은 영화를 할 때에는 마음의 준비를 하고 기다렸다가 온 가족이 꼼짝 않고 집중해서 봤다. 기다리던 가수의 레코드판이 나오면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해서 워크맨으로 닳아빠질 때까지 듣고 또 들었다. 그처럼 콘텐츠를 귀하게 여기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터치 한번이면 책, 신문, 잡지, 영화, 음악 등 온갖 콘텐츠가 순식간에 내 손안에 들어오는 시대가 됐다. 빌 게이츠가 ‘당신 손가락 위의 정보’가 세상을 바꾼다고 20여년 전 설파했던 세상이 눈앞에 있다. 내가 꿈꾸던 세상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가끔은 좀 피곤하다. 꼭 이렇게 많은 정보가 필요한가? 너무 지나치게 편리해진 것이 아닌가? 스마트폰은커녕 휴대폰도 없던 세상에서도 우리는 행복하게 살지 않았는가?
스마트 기기와 디지털 콘텐츠의 홍수 속에 앞으로 더욱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고민을 하게 될 듯싶다. 평소 모바일혁명의 찬미자인 나도 가끔은 정보의 유통이 적고 느린 세상으로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이 오히려 괴롭다.
임정욱 다음커뮤니케이션 임원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907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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