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희 기업은행장과 함께 그의 첫 근무지였던 서울 청계5가점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지점은 30년 전 그곳에 그대로 있었다. 달라진 것은 옛날엔 직원이 30명 넘게 북적거렸는데, 지금은 10여명에 불과하다는 점이었다. ATM(현금자동입출금기) 등 전산화와 자동화가 은행 지점의 인력 수요를 3분의 1로 줄인 것이다. 20년 전 시중은행들은 채용 시즌 때면 대졸자를 1000명 이상 채용했지만, 요즘은 기껏해야 200명 정도다. 그런데 은행들의 몸집은 20년 전보다 10배 이상 커졌다. 시선을 제조업 쪽으로 돌리면 일자리 사정은 더 기가 막히다. 공장의 해외 이전 등으로 최근 20년 사이 제조업에서 100만개의 일자리가 사라졌다. '고용 없는 성장'이 굳어지면서 GDP(국내총생산)가 1% 성장할 때 국내에서 만들어지는 일자리 수는 2000년대 초반엔 9만개였는데, 지금은 4만개로 떨어졌다. 임기 중 새 일자리를 300만개 만들겠다고 공언했던 이명박 정부의 일자리 성적표가 117만개에 그친 것은 이런 구조적 한계 때문이다.
다시 대선 시즌이 돌아와서 각 후보가 일자리 공약을 앞다퉈 내놓고 있다. 대학 창업기지 건설(박근혜 후보), 비정규직 비율 50% 축소(문재인 후보), 노동시간 단축과 일자리 나누기(안철수 후보)…. 다 좋은 말인데 총론뿐이라 공허하다. 어디서, 어떻게, 무슨 돈으로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건지 각론이 없다.
다른 건 몰라도 일자리 공약만은 이대로 가선 곤란하다. 이번 대선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경제 민주화와 사회 양극화의 해법은 결국 일자리 창출에 있다. 양질의 일자리를 어디서 만들어 낼 것인가는 이미 답이 나와 있다. 교육·의료·관광·음식숙박·이·미용 등 서비스 분야의 새 시장 창출이 첫째고, 정규직 근로자들의 양보를 전제로 한 일자리 나누기가 둘째다.
우리나라의 GDP 대비 서비스업 비중은 60%로 미국(79%) 독일(72%) 등 선진국보다 훨씬 낮다. 서비스업의 노동생산성은 OECD(경제협력개발기구) 회원국 중 꼴찌 수준이다. 김석동 금융위원장이 "우리 경제와 관련해 밖에 내놓기 창피한 통계는 모조리 서비스 분야와 관련돼 있다"고 할 정도다.
서비스 산업의 열악한 사정은 역설적으로 이 분야가 일자리 개척의 미답지(未踏地)로 남아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답은 이미 나와 있는데 실행이 안 되는 것이다. 정규직 근로자를 기반으로 하는 노조, 영리(營利) 병원 설립에 대한 의사 집단의 저항, 서비스 고급화를 차별의 제도화로 여기는 반(反)부자 정서 등이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장애물은 정치 영역이 해결해야 하고, 이를 돌파할 정치적 추진력은 새 권력이 등장한 정권 초기에만 기대할 수 있다. 각 후보 진영의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이념적 스펙트럼이 비슷해 일자리 정책의 큰 밑그림에 대한 합의가 가능해 보인다. 누가 정권을 잡든 일자리 정책만은 여야가 공조해 정권 초기에 강력히 밀어붙이자는 합의를 해놓는 것은 어떨까. 일자리 정책 공조는 집권 후 대통령의 정치적 부담을 덜어줄 것이기에 세 후보 모두에게 득이 될 수 있다.
김홍수 경제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5/201211050263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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