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고려대 해부학교실에서 국내 과학수사 요원들에게 지문채취 기법을 강의하던 미국 FBI 교관이 말했다. "지문이 오래돼 쭈글쭈글해지면 더운물에 잠시 넣으십시오. 피부가 탱탱해져 지문 채취하기가 수월해집니다." 과학수사 요원들이 술렁거렸다. "그건 이미 우리가 하고 있는 건데…." 한 경찰서 과학수사팀장이 그 기법은 자기가 2004년 동남아 쓰나미 때 FBI에게 가르쳐준 기법이라고 했다. 일순간 교관의 얼굴빛이 달라졌다.
한국 경찰 과학수사가 FBI를 누른 것인가? 그렇다. 그러나 여기에는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부끄러운 우리 경찰 과학수사의 이면이 있다. 우리나라 경찰이 FBI까지 인정한 이런 기법을 제대로 매뉴얼화하지 못한 것이다. 해외에 발표하지도 못했다. FBI는 이 기법을 2007년 국제감식협회 저널에 발표했다. 우리는 그저 우리끼리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사용하는, 소위 '도제식' 기법이었던 셈이었다.
이 지경이 된 가장 큰 원인은 경찰 과학수사에 연구기관이 없다는 점이다. 연구기관이 있었으면 일선경찰이 개발한 현장기법을 연구기관에서 전문화, 이론화시켜서 해외에 발표하고 우리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날마다 절도사건 감식하기 바쁜 일선 과학수사요원들이 현장기법을 개발한 것만 해도 엄청난 일인데, 이를 승화시키지 못한 제도적 결함을 오랫동안 방치해 왔다. 현장에서 나오는 아이디어로 연구개발해야 할 것은 지금도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연구기관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행정안전부 소속이다.
11월 4일은 과학수사의 날이었다. 1948년 정부수립과 함께 경찰에서 감식을 시작한 날이다. 당시 국과수 업무는 경찰에 소속되어 있었고 1955년 국과수가 창설되면서 내무부로 옮겼다. 국과수가 경찰과 같은 울타리에 있었다면 현장형 연구개발로 과학수사 발전을 크게 앞당겼을 것이다. 대한민국 경찰 과학수사에 연구기관이 없다는 것은 전쟁에서 총 쏘는 사람만 있지, 총 개발하는 브레인이 없다는 것과 같다. 한국 경찰 과학수사에 뇌가 없는 비극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된다.
박영진 경찰청 과학수사센터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4/201211040137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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