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8. 14. 17:37

언젠가부터 난 소설책을 잘 읽지 않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소설가가 그려내는 상상의 세계에 푹 빠져 들어갔다가 내 건조한 현실로 다시 돌아올 때의 바로 그 허무함 때문이다. 난 소설을 읽다 보면 며칠이고 그 소설의 주인공으로 산다. 특히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여전히 설레고, 슬프고, 아프다. 그러나 소설의 그 풍요로운 정서에서 빠져나오면 퍽퍽하기 그지없는 오십대 아저씨의 일상이다. 그 배신감은 말도 못한다. 어릴 적 이소룡 영화를 보고 나온 뒤에 일어나는 일과 사뭇 흡사하다. 이소룡의 영화를 보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미간을 찌푸리며 사방을 노려보게 된다. 걸음도 달라진다. 고양이처럼 발바닥을 붙여가며 사뿐사뿐 걷는다. 그러다가는 꼭 힘센 놈에게 걸려 형편없이 얻어터지게 된 후, 질질 짜며 돌아서던 어린 시절의 바로 그 처량함이다.


내 안의 유치한 로맨티시즘을 극복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살기로 한 요즘, 난 주로 역사책만 읽는다. 뭐 심각한 한국 근현대사, 유럽사, 그런 거 아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의 역사책이다. 내 책장에 꽂혀 있는 역사책들을 간단히 나열해보면 이렇다. 사생활의 역사, 구경꾼의 역사, 철도여행의 역사, 침실의 문화사, 소문의 역사, 나체와 수치의 역사, 여성의 역사, 먹거리의 역사, 똥오줌의 역사 등등. 족히 수십권은 되는 것 같다. 이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책은 꽤 오래전에 읽은 미국 스탠퍼드대학의 여성학자 마릴린 얠롬의 <유방의 역사>다.


얠롬에 따르면 여인들의 ‘가슴’은 문화사적 개념이고, 이 개념이 여성의 체형 변화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여성의 가슴 크기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따라 달라졌다는 이야기다. 모성이 강조되던 시대에는 여성의 가슴이 실제로 풍만해지고, 여성의 사회진출이 많아질수록 여성의 가슴이 작아졌다. 한때 마릴린 먼로처럼 가슴도 크고 엉덩이도 큰 여자가 사랑받던 시대에 삐쩍 마르고 가슴도 거의 없는 여성의 몸이 이상적으로 여겨지기 시작한 이유도 여성의 사회진출과 깊은 상관이 있다는 거다.


거식증 환자에 가까운 몸매의 모델들의 워킹을 기억하는가? 가슴도 없고 엉덩이도 작은 소년처럼 날렵한 여성의 몸이 강조된 이유는 남성과 경쟁하기 위해서였다. 생물학적으로 남성처럼 우람한 몸을 가질 수 없는 여성이 남성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민첩한 소년의 몸매를 갖는 방법밖에 없다는 거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여성들에게는 이중의 과제가 주어진다. 사회적 활동과 더불어 모성적 매력은 물론 에로틱한 매력까지 가져야만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가슴만 크고 엉덩이는 소년처럼 날렵한 기형적 몸매가 나타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철없는 한국 남자들의 ‘큰 가슴 페티시’는 이런 시대적 변화의 기회주의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사’라고 일컬을 수 있는 아주 사소한 것들에 관한 역사책을 읽다 보면 삶에 대한 ‘구성주의적’ 통찰을 갖게 된다. 아주 자연스럽게 여겨왔던 내 일상의 모든 게 역사의 어느 순간부터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바라보는 시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아주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것들의 숨겨진 의도를 골똘히 생각하게 된다.


여인들의 가슴 깊이 파인 옷을 드러내놓고 봐서도 안 되고, 그렇다고 아예 모른 척할 수도 없는 이 난감한 계절의 당혹스러움도 마찬가지다. 가슴의 크기까지 강요당해온 여인들이 이제 아주 사소한 방식으로 복수하기 시작한 것은 아닌가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김정운 문화심리학자·여러가지문제연구소장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33887.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