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6. 11:59

#10여 년 전 몽골을 방문했다. 한 목동이 내게 “저기에 말을 탄 사람이 오고 있다”고 말했다. 지평선 끝까지 샅샅이 훑어봤지만 내 눈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두 시간쯤 흘렀을까. 그가 말했던 사람이 정말로 나타났다. 몽골인의 시력은 2.0이 넘는다더니 과연 대단했다. 그는 단순히 지평선 끝에서 개미처럼 보이는 사람을 알아본 것이 아니라 두 시간 뒤의 미래를 내다본 것이다. 말을 탄 사람이 칭기즈칸 시대의 전사였다면 나는 꼼짝없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속도가 공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해 왔는데, 거꾸로 공간을 장악하면 시간을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SBS ‘런닝맨’에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 ‘공간을 지배하는 자’와 같은 초능력 캐릭터가 나온다. 문화 분야에도 이런 도구가 있다. 바로 번역이다. 국내에는 번역사업을 지원하는 두 개의 공공기관이 있다. 한국문학을 번역해 해외에 소개하는 한국문학번역원(KLTI)과 우리의 고전작품을 한글로 번역하는 한국고전번역원(ITKC)이다. 전자가 우리 문학의 ‘공간적 확장’을 지원한다면, 후자는 우리 고전의 ‘시간적 영속성’을 가능케 하는 기관이다.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중국 작가 모옌으로 발표되자 일부 미국 언론은 “번역가 하워드 골드블랫에게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썼다. 미국 노터데임대 중문과 교수인 골드블랫은 1970년대부터 모옌의 ‘붉은 수수밭’, ‘술의 나라’, ‘생사피로’ 등을 비롯해 중국 현대 작가의 작품을 번역해 서방에 소개해 온 독보적 존재였다. 그는 번역에서 양보다 질의 중요성을 깨우쳐 준다. 그는 “중국어는 잘 모르면 작가에게 물어볼 수 있다. 그러나 번역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영어 표현”이라고 말한다. 그는 “번역가가 최우선시할 대상은 작가가 아닌 독자”라고 선을 그었고, 모옌도 “번역된 작품은 더는 작가가 아닌 번역자의 것”이라고 화답했다.



#요즘 나는 한국고전번역원이 한글로 번역한 ‘고전종합DB’의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가을, 한강 등 관심 키워드만 치면 역사 문헌이 줄줄이 쏟아지기 때문이다.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계기로 찾아보니 신라시대 최치원이 쓴 ‘강남녀(江南女)’란 시가 튀어나왔다. “강남의 풍속은 예의범절이 없어서/딸을 기를 때도 오냐오냐 귀엽게만/화장하고는 둥둥 퉁기는 가야금 줄/배우는 노래도 남녀의 사랑을 읊은 유행가가 대부분/(중략)/그러고는 하루 종일 베틀과 씨름하는/이웃집 여인을 비웃으면서 하는 말/베를 짜느라고 죽을 고생한다마는/정작 비단옷은 너에게 가지 않는다고,” 이 시에서 강남은 중국 양쯔 강 남쪽 지방이지만, 강남 여자에 대한 풍자는 요즘과 통해 웃음이 절로 나온다. 또한 가난한 여자가 자신이 짠 비단옷을 입을 수 없다는 이야기는 카를 마르크스보다 1000년이나 앞서 ‘노동소외론’(생산물로부터의 소외)를 설파한 것 같아 흥미롭다.

#한국인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언제쯤 나올까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우선 좋은 콘텐츠를 창작하고, 해외에 적극 알려야 한다. 그런데 한국인이 수천 년간 쌓아 온 지식문화의 보고인 고전이 한문으로 돼 있어 제대로 창작에 활용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비극이다. 한국고전번역원은 조선왕조실록은 완역했지만 승정원일기는 9.6%, 일성록은 14.6%밖에 번역해 내지 못했다. 한국문학번역원이 해외에 번역지원한 문학작품은 800여 종에 불과하다. 일본의 2만250종에 비하면 갈 길이 멀다. 두 기관의 올해 예산은 각각 127억 원, 78억 원에 불과하다. 내년에 4조 원대에 육박하는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적다.

 

 



전승훈 문화부 차장

 

http://news.donga.com/3/all/20121018/50192993/1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