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플로리다의 지역신문인 '템파베이 타임즈'. 이 신문은 자신만의 핵심역량을 찾아내 2009년 언론계 최고 권위의 '퓰리처상'(전국보도부문)을 받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는데 성공했다. 정치인들이 유권자들의 환심을 사거나 다른 정당의 평판을 망가뜨리기 위해 던지는 발언 하나 하나를 꼼꼼히 분석해 사실과 거짓말을 가려내는 '폴리티팩트' 서비스 덕분이었다.
폴리티팩트는 지역 정치인들 뿐만 아니라 대통령 후보와 전국무대 정치인의 발언들까지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그 서비스 웹사이트에는 정치인 발언의 사실 여부에 따라 자동차 속도계를 닮은 '사실여부 계기판'에 '사실', '거의 사실', '절반만 사실', '거의 거짓', '거짓', '터무니 없음' 이라고 표시해준다. 전 현직 기자와 전문가 수십명으로 구성된 전담팀은 정치인들의 발언을 24시간 모니터하며 발언의 배경과 관련 통계를 분석하는 등 탐사보도를 방불케 하는 인력과 정보를 동원해 사실 여부를 판정해낸다.
최근 미국 언론은 이러한 '팩트체크'(사실확인) 보도를 중시하는 추세다. 지난주 '타임'지에도 오바마 캠프와 롬니 캠프가 치열한 공방을 펼치며 남발했던 발언을 꼼꼼히 분석한 기사가 실렸다. '우리는 해외인력 아웃소싱의 선구자를 백악관에 들일 수 없다'며 미트 롬니를 공격한 오바마의 발언은 왜곡됐다는 판정을 받았다. 롬니가 직접 관여하지 않은 일을 그의 책임으로 떠넘겼다는 것이다. '지난 10년간의 경제 침체 이후 미국은 50만개의 제조업 일자리를 새로 얻었다'던 오바마의 발언은 알고 보니 2009년 이후 없어진 100만개의 일자리는 쏙 빼놓고 한 말이었다. 당선 되면 1,200만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롬니의 호기로운 약속도 알고 보니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없이 향후 4년간 창출될 일자리수라고 경제 전문가들이 예측해온 터였다.
이렇듯 발언의 정확성을 체크하는 것 못지않게 얼마나 일관된 입장을 견지했는가도 정치인의 신뢰성에 핵심적인 요소다. 앞서 언급한 '폴리티팩트'의 경우 정치인의 말이 과거와 비교했을 때 바뀌었는지 여부를 '전면 말바꿈', '절반 바꿈', '말바꿈 없음'으로 표시해준다. 독자들에게 특정 정당이나 정치인이 얼마나 일관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가 숨김없이 까발리는 것이다.
이런 예에 비하면 우리 언론의 현실은 믿기 어려울 정도로 참담하다. 일부 언론은 수십년 역사를 자랑하는 '주류 매체'라고 자부하지만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 측의 폭로를 검증하기는커녕 거기에 온갖 억측과 '카더라 통신'으로 살을 붙이고 날개를 달아주기까지 한다. 단지 투표 없이 편하게 금배지를 달았다는 이유로 기자회견장에 나가 당이 마련해준 카더라 폭로내용을 읽어 내려가는 어느 국회의원의 모습은 그 내용을 열심히 받아다 대서특필해주는 기자의 모습과 닮았다. 저질스러운 정치판에 잘 어울린다는 면에서.
정도를 걷는 언론사나 그렇지 않은 언론사나 요즘 재정적으로 많이 힘들다고 듣고 있다. '시시비비'를 가리는 언론의 근본적인 기능이 꾸준히 망가져 왔음을 고려한다면 제 역할을 못하는 언론이 먹고 살기 힘든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느껴진다. 태풍 볼라벤이 북상할 때 창문에 신문을 붙이면서 그 유용성을 처음 느꼈다는 시중의 우스개는 단순한 우스개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우리 언론이 포털 사이트 이용자의 클릭을 유도하기 위해 기사 제목을 살짝 비틀어 선정성과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안 언론의 소비자들은 시간이 흐를 수록 '제대로 된 언론'과 '사이비 언론'의 구분이 모호해짐을 느낀다. 거기서 거기라는 얘기다. 비록 부수나 시청률은 좀 떨어지더라도 '사실여부 계기판'같은 걸로 사람들의 판단에 중심을 잡아줄 수 있는 그런 언론이 우리에겐 정말 필요하다. 그런 계기판 같은 언론은 시간이 흐를수록 여론지도층의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언론이 소비자들에게 색깔 없는 돋보기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는, 작지만 소중한 희망. 미디어를 연구하는 학자로서 난 그 희망을 결코 버릴 수 없다.
김장현 미국 하와이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10/h201210172101048192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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