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4년 전 첫 대선 도전 때 미 국민에게 ‘담대한 희망(audacious hope)’을 전파했다. 미국 역사에서 조국이 분열과 침체, 도전과 위기에 직면할 때 나라를 구한 건 정치였으며, 정치만이 다른 분야가 해낼 수 없는 국가적 과제를 수행할 수 있다는 믿음이었다. 이 깊은 정치 불신의 시대에 ‘정치의 고유 업무가 국가전략을 수행하는 일’이라는 긍정적이고 담대한 정치관은 당시 세계인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2012년 한국의 대선 후보들에게 국가발전 전략은 찾아보기 어렵다. 국민 비위를 맞추는 방법론은 차고 넘친다. 국가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진화하는 유기체적인 성질이 있다. 대한민국 64년은 건국과 체제방어, 산업화와 민주화, 북방외교와 남북화해, 시민참여의 국가적 과제를 수행하면서 진화했는데 한복판엔 어김없이 그 시대의 대통령들이 있었다.
박근혜·문재인·안철수 대선 후보는 경제민주화, 일자리, 복지 세 가지 공약을 반복해 외칠 뿐 유권자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국가전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세 가지 공약은 다수 국민이 현재 느끼는 결핍감을 해소하는 방법론이다. 후보들이 표를 얻기 위해 국민의 환심을 사는 방법론에 집중하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으나 국민의 결핍감을 해소해 어떤 국가를 만들어 갈 것인가 하는 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건 유감이다.
그나마 이들 방법론은 세 후보 ‘공통 공약’처럼 인식될 정도로 차별성이 없어 상상력 빈곤한 후보들이 서로 베끼기를 한다는 느낌마저 주고 있다. 재벌개혁을 하기 위한 순환출자를 앞으로만 못하게 할 것이냐, 기존의 것도 못하게 할 것이냐 하는 정도 갖고 ‘내가 더 현실적이다’ ‘내가 더 개혁적이다’ 티격태격하는 모습에서 대(大)전략은 없고 소(小)전술에만 의존하는 도토리 키 재기식 후보들의 모습이 겹쳐진다.
차별성 없는 방법론, 전술에 집착하다 보니 유권자의 거대한 이동을 겨냥한 창조적 전략은 꿈도 못 꾸고, 그저 자기 쪽 유권자를 지키기 위한 네거티브 정치공방에 몰두하는 이번 대선의 특징을 낳았다. 박근혜 후보의 정수장학회 문제, 문재인 후보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이슈는 과거사·안보관을 검증하는 의미를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느덧 공허한 정쟁으로 떨어지고 있다.
대선은 후보들이 국민의 아픔을 헤아리는 집권 과정이자 향후 5년간 국가의 발전방향을 제시하는 통치 준비과정이기도 하다. 후보들은 답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다음 진화단계는 무엇인가. 미국·중국·일본·북한의 리더십이 새로 정비돼 한반도와 동아시아 질서의 격변이 예상되고, 누구의 눈에도 환히 보이는 장기 불황의 복합 위기가 한국이 맞이할 향후 5년의 객관적 정세다. 후보들은 차별성 없는 국내 이슈로 국민의 환심만 살 게 아니라 국가 자체가 어떻게 생존하고 번영할 수 있겠는지 선명한 국가전략을 유권자에게 제시해야 한다. 정책공약의 정점에 국가전략을 위치시키고, 그 밑에 국민을 위한 정책과 그것들을 수행할 사람을 제시하는 완성도 높은 통치 청사진을 하루바삐 내놔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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