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우리 애는 꿈이 없어요. 어떡하죠?”
학부모 상담을 하다 보면 자주 듣는 말이다. CF에도 나온다. ‘우리 아이들이 언제부턴가 같은 꿈만 꾸게 되었다’고.
학기 초에 6학년 아이들에게 ‘하고 싶은 일, 이루고 싶은 일’을 적어 내게 했다. 영화 ‘버킷리스트’ 내용을 얘기해 주면서 열심히 독려했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가수 되기, 여행하기’ 등으로 ‘짤막하게’ 쓴 것이 대부분이었다. ‘없다’고 쓴 아이들도 있었다.
아이들에겐 ‘이야기의 힘’ 필요
그러던 차에 수련회를 가 저녁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선생님, 저는 스무 살이 되면 하고 싶은 일이 많아요.”
“그래?”
“첫 번째로 클럽에 가고 싶어요. 어른들이 그러는데 꽤 재밌는 곳이라고 했어요. 자전거 국토순례도 하고 싶어요. 선생님이 읽어주신 ‘불량한 자전거 여행’에 나온 것처럼 자전거 타고 고생하며 여행해 보고 싶어요.”
“와! 멋지다! 선생님도 같이 갈까? 자전거 여행!”
“그럴까요? 마음 맞는 친구 몇 명이랑 스무 살 되면 꼭 해봐요, 우리.”
“저도 할래요!” “저도요 저도!”
그때 내 머릿속 전구에 불이 켜졌다. 아이들을 꿈꾸게 할 수 있는 방법, 바로 ‘이야기’였다. 입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든, 책에서 본 이야기든 아이들에겐 ‘이야기의 힘’이 필요했다. “엄마가 싫어하지만 축구선수 하고 싶어요. 박지성 골 넣은 것 보셨어요?” “엄마는 의사 하라는데 저는 마술사 하고 싶어요. 마술사 최현우 아세요?” “가수도 하고 싶고, 스무 살이 되면 배낭 메고 캠핑도 하고 싶어요.”
아이들에게 꿈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들에겐 그들 나름대로 꿈이 있었고 그런 꿈을 꾸는 이유가 있었다. 하고 싶은 일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면 아이들의 눈이 반짝였다. 이들은 누군가와 자신의 생각을 나누고 싶어 하지만 대부분 부모님과는 이야기가 잘 통하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은 부모님이 반대할 거라고 생각했다.
학교로 돌아와 내가 그동안 여행했던 곳의 사진들을 보여주었다. 어느 날부턴가 아이들이 쓴 글에서 ‘선생님처럼 스페인에 가 보고 싶다. 바르셀로나에 꼭 가 볼 것이다’, ‘선생님처럼 올레길을 꼭 걸어 보고 싶다’와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대학에 가면 재미있는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다’, ‘밴드나 연극을 해보고 싶다’와 같은 이야기도 나왔다. 버킷리스트(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일)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사회 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평야에 대한 설명을 하시다가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게 지금도 생생하다.
“선생님이 여행을 엄청 좋아하는데 호남평야에 가 본 적이 있거든. 엄청 넓고 큰 바둑판같이 생겼어. 끝없이 논이 이어져 있지. 그 호남평야 가운데로 선생님이 걸어 들어가 서서 두 팔을 벌리고 있었던 게 생각나.”
나는 그 말을 들으며 나중에 어른이 되면 ‘호남평야에서 팔 벌리고 서 있기’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요즘 아이들은 이야기 들을 시간도, 책 읽을 시간도 없다. 영어학원, 운동학원, 음악학원을 전전하고 학원 숙제와 학습지를 하고 나면 하루가 금방 간다. 논술학원에서 독서토론논술이라며 억지로 읽히는 지문 속에서 겨우 글을 대한다. 책을 읽는 것은 간접경험을 통해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상상력의 한계를 뛰어넘으며 새로운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는 작업이다. 학원에서 보여 주고 읽어 주는 책은 긍정적인 역할도 하겠지만 즐거움을 생산해 내지는 못할 것이다. 즐겁지 않은 활동 가운데 얻은 소재는 지식으로서의 역할은 하지만 이야깃거리로는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책들에서 본 것, 들은 것들은 실제로 경험하고 싶은 ‘버킷리스트’에 오르지 못한다는 얘기다.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꿈을 가지라 말하면서도 어떤 꿈을 꿀 수 있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아이들이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직업은 한정적이다.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기회도 거의 없다. 그런데 꿈이 없다고 아이들을 탓하기만 한다.
내 꿈은 가난한 나라에 작은 학교를 세우는 것이다. 나는 우리 반 아이들에게 내 꿈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나의 후원으로 학교에 다니는 인도네시아 학생의 사진과 편지를 보여 준다. 그러면서 지금은 비록 소박하지만 이렇게 한 사람을 돕는 것으로 꿈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했는데 언젠가는 진짜 학교를 세울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한다. 그러면 아이들이 나중에 그 학교에 가서 아이들을 가르치겠다며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준다.
어른들의 이야기부터 들려주자
최근 수년간 ‘스토리텔링’이 유행이었다. 광고에도, 취업에도, 상품에도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외쳤다. 그런데 아이들이야말로 이야기가 필요하다. 꿈을 꿀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야기, 해보고 싶게 만드는 간접경험들. 나는 수업을 특별히 잘하는 교사도 아니고, 남보다 뛰어난 인성을 가진 교사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이렇게 글을 쓰게 된 동력은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깃거리를 더하고 싶은 마음과 다들 주저하는 모험을 실행하고자 하는 용기였다.
‘왜 꿈이 없느냐’고 아이들을 탓하기 전에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자. 어렸을 때 하고 싶었던 일, 앞으로 하고 싶은 일, 기억에 남는 책, 영화, 음악 이야기를 해보자. 그 이야기 끝에 아이가 “나도 그거 해보고 싶어”라고 말한다면 성공이다. 그리고 함께 예쁜 공책에 혹은 파일에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보자. 바로 지금 말이다.
장민경 초등학교 교사
http://news.donga.com/3/all/20121018/501930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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