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체처럼 흘러내리는 공동체 한국은 그 강도가 더욱 심하다 사회 붕괴가 개인 멘붕으로…
트위터, 페이스북, 블로그 등 인터넷 공간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요즘 특히 유행하는 단어가 있다. ‘멘붕’이 그것이다. 멘붕은 ‘멘탈 붕괴’의 줄임말이고, ‘멘탈’은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멘탈리티’의 줄임말이다. 즉 멘붕은 ‘정신이 허물어져버린 상황’을 의미한다.
애초에 게임을 하다 갑자기 아이템이 사라지거나 상대에게 졌을 때나, 인터넷 커뮤니티 내의 논쟁에서 패배했을 때 쓰이던 이 말은 실생활로 확장되어 갑작스레 당혹스럽거나 창피한 일을 당했을 때, 혹은 예상치 못했던 일에 직면하여 어찌할 바를 모를 때 두루 사용하는 말이 되었다. 여기서 알 수 있듯 ‘멘붕’은 자기도 모르게 ‘갑자기’ 찾아오는 심리적 공황 상태다. 그것은 구조적인 문제로 인해 발생한 결과 앞에서의 비판적 성찰이 아닌, 사건의 강도와 속도에서 발생하는 심리적 쇼크에 가깝다. 이 단어는 날마다, 아니 거의 매 시간 새로운 이슈가 터지는 게 일상이 된 ‘다이내믹 코리아’의 어떤 측면을 잘 드러낸다.
멘붕과 더불어 미디어를 장악한 또다른 표현들인 ‘○○녀’, ‘××남’이라는 호칭 역시 수시로 발생하는 사건의 속도를 따라잡기 위한 임시방편에 가깝다. 두 표현 모두 바탕에는 상식을 뒤엎는 일을 경험할 때 느끼는 ‘황당함’의 정서가 깔려 있다.
사회를 지탱하는 가치에 대한 광범위한 합의가 사라지는 시대, 곧 가치의 상대성이 증폭되는 시대에 황당함은 지배적인 감수성이 된다. 멘붕을 일으키는 황당함의 빈발은 우리 사회가 문화적 위계의 해체와 상대적 가치의 만개로 특징지어지는 이른바 포스트모던 사회에 확실히 들어섰음을 보여준다. 이런 점에서 황당한 취향을 가진 이들을 등장시켜 평범한 ‘지구인’의 멘붕을 초래하는 <화성인 바이러스>와 같은 프로그램은 의미심장하다.
이러한 문화적 변화의 기미는 이미 1990년대부터 감지되었으나 명확하게 나타난 것은 최근이다. 가령 2000년대 초반에 유행했던 ‘엽기’가 대상에 대한 혐오감을 강하게 표현함으로써 가치의 구분을 명확히 하는 주체의 모습을 여전히 담고 있는 데 반해, 현재의 멘붕은 상대화된 가치와 해석을 요하는 사건의 범람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주체의 무기력감을 드러낸다.
이런 무력한 주체의 모습은 사회경제적 환경의 변화와 맞물려 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더불어 한때 견고하고 안정적이었던 질서와 제도가 곳곳에서 허물어지고 있다는 진단은 더이상 논란거리가 아니다.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를 ‘액체화된 근대’라고 표현한다. 국가나 노조, 복지제도, 공동체 등 근대를 지탱했던 견고한 질서가 모든 사회적인 것을 해체하며 시장에 넘기는 신자유주의에 의해 액체처럼 흘러내린다는 뜻이다.
‘견고한 질서’조차 제대로 있었던 적이 없는 한국에서 ‘액체화’의 강도는 세계 어느 곳보다 심하며, 변화에 대한 책임은 거의 전적으로 개인에게 전가된다. 그 속에서 어떻게든 생존해야만 하는 개인들이 밀려오는 항상적 충격과 공포를 멘붕이라는 유머러스한 표현으로 완화시켜 숨을 고르는 일은 생존을 위한 일종의 전술이다.
삶의 모든 결과를 개인이 책임져야 하는 곳에서 ‘사회의 붕괴’는 ‘개인의 멘붕’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어쩌면 미래는 멘붕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미 우리 앞에 도달해 있는지도 모른다. 멘붕이 징후적인 이유는 이 때문이다.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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