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1. 5. 04:38

이것은 모두 우연이다. 지난 9월9일 이탈리아 베니스영화제에서 김기덕 감독이 영화 <피에타>로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그때 가수 싸이는 미국에서 자신의 트위터에 “나 또 〈ABC 뉴스〉에 나왔다”는 글을 올리고 있었다. 엽기발랄 싸이와 자칭 ‘열등감 괴물’ 김기덕 감독이 비슷한 시기 지구 반대편에서 떠오른 것은 무슨 조화일까? 공통점은 또 있다. 김기덕 감독은 몇 년 전부터 그러했듯 이번 베니스 시상식에서도 수상 소감을 말하는 자리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그보다 이틀 전 가수 싸이는 미국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VMA) 시상식 무대에 등장해 “기분이 너무 좋고 너무 행복하다. 이 무대에서 이렇게 한국말로 한 번쯤 말해보고 싶었다. 죽이지?”라고 한국어로 말했다. 그러나 그들이 갑작스레 한국 문화 대표선수로 떠오른 상황은 낯설고 어색하다. 우리의 질문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한국 비평계에서 어설픈 만듦세와 억지춘향식 상징체계로 비판했던 것이 서구에선 결함이 아닌 '에너지'로 사고된다는 인상이다. 김기덕 영화의 '불완전성'이 사회와 제도, 체제, 인간의 결핍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듯하다.-영화평론가 장병원


자신을 초라하게 여겼던 자의 자기 구원

김기덕 감독은 1960년 경상북도 봉화의 산간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상이군인이었고 어머니는 시각장애인이었다. 어려서는 매 맞는 것에, 14살부터는 고된 일에 단련이 됐다. 자신의 삶을 고백한 영화 <아리랑>에서 “폐차장에서 일할 때, 전자제품 공장에서 일할 때, 거리에서 그림을 그릴 때 내가 항상 초라하게 느껴졌다”고 한다. 가장 먼저 그를 구원한 것은 영화였고 다음으로는 이국적인 문화였다. 1990년 김기덕은 가진 돈을 모두 털어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른다. 가난하고 배움이 짧았던 그는 파리에서 처음으로 영화를 보고 거리의 화가로 떠돌며 시나리오를 구상했다.

오랜 기원은 성취됐다. 9월14일 <피에타>는 누적 관객 수 20만 명을 넘어섰으며, 9월11일 열린 기자간담회 뒷자리는 그를 섭외하려는 방송사 제작진들과 그에게 지지의 변을 듣고 싶은 정치인들이 보낸 사람들로 북적였다. 영화 <아리랑>에는 여러 명의 김기덕이 나온다. 박해받는 김기덕, 세속적인 욕망에 가득 찬 김기덕, 광폭한 김기덕, 불쌍하고 하찮은 김기덕…. 영화 <아리랑>은 정말 끝난 걸까? <피에타> 홍보를 위해 오랜만에 대중 앞에 나선 김기덕 감독은 그중 한 명의 김기덕 감독인 듯 보이기 때문이다. 일체의 지면 인터뷰를 사절하고 <강심장> <두드림> <백지연의 피플 인사이드> <손석희의 시선집중>, 그리고 기자간담회 등 다수를 대상으로 하는 자리에 나온 그가 가장 많이 한 말 중 하나는 “나도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영화가 불러일으킨 변태나 사이코 같은 비정상적 이미지, 관객과의 불화, 평단과의 불화로 짊어졌던 짐을 내려놓으려는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아리랑>에서 “난 영화를 찍고 싶다고. 이렇게라도 해서 영화를 찍고 싶다고. 영화를 찍어서 계속 영화감독을 하는 걸 보여주고 싶다”고 울부짖던 50대의 중년 남자는 분노에 지치면 이렇게 흐느낀다. “수많은 영화제들 그립습니다. 당신들의 영화제가 저를 발견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죠. 그냥 흥행에 실패한 영화감독이겠죠. 당신들이 저를 선택해 저를 설명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고, 한국에서 어떤 성과도 내지 못했지만 김기덕을 인정해주는….” 사람들을 믿을 수 없어 오두막에서 혼자 벽을 보고 중얼거리던 그를 구해준 손길은 밖으로부터 찾아왔다. 18편의 영화 중 굵직한 해외 영화제 수상 기록만 30번이 넘는다. 이번에 수상한 이탈리아 지역에서 김기덕만을 다룬 평전과 분석서만 3권. 김기덕의 스타일에 영향을 받은 영화인들과 음악인도 많다.

» 배우 이정진은 <피에타>가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받은 것을 두고 올림픽 경기 금메달에 비겼다. 한 예술인의 영광스러운 순간을 국가의 성과로 읽는 것은, 한국 사람들에겐 차라리 '상식'에 가까웠다.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수상 소식에 손을 흔드는 김기덕 감독. <씨네21> 최성렬

아시아의 거장에게 영화제가 없었다면?

서구 비평가들이 쓴 김기덕에 대한 글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가 그가 가난하고 많이 배우지 못했으며 파리에서 영화를 처음 접했다는 사실이다. 독일의 영화학자 토마스 쾨브너가 엮은 <영화감독. 전기. 작품 설명. 작품 목록>엔 이렇게 적혀 있다. “김기덕은 국제 영화 무대에서 인정받는 예술인으로 등극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박찬욱 등의 감독과는 달리 자국에서 인정과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른바 사회의 미천한 사람들이 등장하는 그의 사이코섹슈얼한 우화가 한국 영화 관객에게는 너무도 낯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럽에서는 김기덕의 인정사정 없고 비정한 관계의 자화상들이 고유한 예술작품의 지위를 갖는다.” 영화평론가 장병원씨는 “한국 비평계에서 어설픈 영화의 만듦새와 억지춘향식 상징체계로 비판했던 것이 서구에선 영화적 결함이 아닌 ‘에너지’로 사고된다는 인상이다. 김기덕 영화의 ‘불완전성’이 사회와 제도, 체제, 인간의 결핍을 더욱 강렬하게 드러낸다고 생각하는 듯하다”고 전한다. 김기덕 감독은 곧잘 한국 평단의 비판과 홀대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평단에도 김기덕을 지지하는 평론가와 그렇지 않은 평론가가 있는 것처럼 유럽도 그렇다. 프랑스 영화전문지 <카이에 뒤 시네마> 편집장은 “우리 잡지는 대부분의 프랑스 미디어와 달리, 겉만 번드레한 그의 영화에 결코 지지를 보낸 적이 없다. 칸에서 상영했던 <아리랑>은 정말 비극이다”라고 혹평했다. 중요한 것은 한국에서 국외자였던 김기덕 감독이 유럽에서는 아시아 영화의 한 조류를 형성했다는 사실이다. 홍상수 감독이 프랑스에서 ‘누벨바그’의 전통을 잇는 감독으로 여겨진다면 “김기덕은 프랑스 영화의 한 전통인 ‘시네마 뒤 룩’(내러티브가 아닌 이미지를 중심으로 영화를 사고하는 경향)의 긴밀한 영향 아래 있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영화평론가 마르쿠스 슈티글레거)고 한다.

지난해 열린 부산영화포럼에서 한 발제자는 “천카이거와 장이모 감독에게 영화제가 없었다면 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물었다. 그리곤 지금도 중국 공안 당국과 불화하는 자장커 감독은 물론 대만의 차이밍량과 허우샤오셴, 일본의 가와세 나오미와 고레에다 히로카즈, 한국의 김기덕 감독도 그 예로 들었다. 1970년대에는 구로사와 아키라 등 일본 영화감독들이 영화제를 통해 이름을 알리고 자국의 대표로 자리잡았다. 지금은 영화제가 발견한 아시아 여러 국가의 영화감독들이 ‘아시아 영화’라는 조류를 형성한다.

싸이에게 유튜브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7월15일 발매된 싸이 6집 <싸이육갑(甲)>은 음원 공개 직후 주요 음원 사이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국내에서도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그러나 한국 대중음악 시장의 빠른 소비 구조와 10대 팬덤을 중심으로 한 아이돌 편대에 밀려 가온차트에서 발표한 7월 종합 순위는 4위를 찍었다. 여기까지는 싸이가 평소에 날려오던 기본타. 속속 발표되는 신곡들이 <강남스타일>을 치고 올라오려고 할 때쯤 예상치 못한 반전이 벌어졌다. “커피 식기도 전에 원샷 때리”며 무대 조명을 내리려던 싸이가 다시 사이키 조명을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마카레나>, <투낙투낙툰> 계보 잇는 음악

출발은 미국이다. 7월30일, 미국의 유명 래퍼 티-페인이 93만 팔로어에게 “이 영상이 얼마나 놀라운지 말로 설명할 수가 없다”며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를 소개했다. 빠르게 번져나간 입소문은 8월2일 유튜브에서 1천만 조회 수를 기록하게 했고, 다음날 〈CNN〉에서는 <강남스타일> 열풍 조짐을 뉴스로 다뤘다. 지금도 그의 유튜브 조회 수가 경신될 때마다 미국 내 여러 매체에서 빠르게 기사로 다룬다. 영국에서는 <강남스타일>이 〈BBC 라디오1〉에 소개되기도 하고, 무가지인 <메트로> 문화면에서 비중 있게 보도되기도 했다. 9월10일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1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강남스타일> 플래시몹을 벌이기도 했다.

<강남스타일>은 애초에 내수용으로 기획된 음악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음악과 비디오는 이미 외래적이고 잡종이다. 서정민 <한겨레> 음악전문기자는 <강남스타일>을 스페인의 로스 델 리오 듀오의 <마카레나>나 ‘뚫흙송’으로 알려진 인도 가수 달러 멘디의 <투낙투낙툰>의 계보를 잇는 음악으로 본다. 다만 <마카레나>나 <투낙투낙툰>이 자국 스타일로 만들어져 세계의 돌림노래가 됐다면 중독성 강한 <강남스타일>은 국적불명이다. 처음에 타이 사람들은 ‘깜난 스타일’(동네 면장 스타일)로, 미국 사람들은 ‘오픈 콘돔 스타일이야’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김수정 충남대 교수(언론정보학)는 “전세계 클럽에서 유행하는 일렉트로닉 음악을 기본으로 하는데다 강남을 풍자하는 우리만의 문화 코드, 서구의 성적 코드, 심지어 인도 영화의 뮤지컬적 요소마저 지니고 있는 혼종성을 지닌 음악”이라고 분석한다. <강남스타일>은 투기를 통해 축적된 부로 강남에 입성한다고 곱잖은 시선을 보내지만 실은 모두가 강남에서 살고 싶은 우리들의 모순된 욕망을 우스운 제스처로 날려버린단다. 서구인들은 노홍철이 엘리베이터에서 싸이를 다리 아래에 깔고 춤추는 장면을 동성애 암시로 받아들인다. 김수정 교수는 “우리의 문화 경험은 이미 여러 나라의 문화적 혼종이다. 유튜브를 통해 여러 나라의 문화적 수용자를 만나는 순간 더 다국적인 문화 경험으로 해석되고 확장한다”고 했다.

싸이가 말춤을 타고 달릴 수 있었던 토양은 이렇다. “한국의 콘텐츠를 본다는 데 감격해 <강남스타일>을 한국 문화 진출로 인식하지만 외국의 한류 소비층은 대부분 일본을 통해 아시아의 문화적 체험을 거친 층이다. 프랑스에서 한국 드라마 시청자는 일본 만화 망가에 빠져들었던 30대가 대부분이다. 이미 동아시아 문화 경험이 있는 마니악한 층이다.”홍석경 프랑스 보르도대 교수의 진단이다. 10대는 유튜브를 통해 그보다 빠르게 케이팝과 <강남스타일>을 접한다. 속도는 빠르지만 휘발성이 강하다. 물론 한국 문화가 서구에 알려진 것은 최근의 현상이고 폭발적이고 단박에 드러나며 빠른 속도로 일본 문화를 대체하고 있다는 점은 눈에 띈다.

» 올여름 강남을 스스로 풍자하며 한국적인 재미를 추구한 <강남스타일>이 세계의 돌림노래가 됐다. 이 노래는 서구적인 웃음 코드, 세계적인 음악 추세인 일렉트로닉 팝과 훅송으로 만들어질 때부터 국적 불명, 혼종적인 노래였다는 분석이 많다. YG엔터테인먼트 제공

‘근본 없음’이 오히려 케이팝의 저력

싸이의 <강남스타일> 흥행이 유튜브에서 뮤직비디오를 퍼나른 자발적 문화 전파자들에게서 시작됐다면 한국 아이돌 음악을 위시한 케이팝은 기획사라는 전략기지에서 출발한다. 첫 번째로 꼽히는 것이 JYP엔터테인먼트의 원더걸스의 미국 진출이다. JYP가 원더걸스로 미국 진출을 시도했을 때 1960년대 미국 대표 레이블인 모타운 걸그룹 사운드를 표방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SM엔터테인먼트는 규모의 경쟁력을 내세워 유럽으로 출격했다. 홍석경 교수는 “서구 보수 중산층의 취향을 거스르지 않는 한류 아이돌 콘텐츠, 팬과 스타가 밀접한 관계를 갖는 한국 특유의 팬문화가 유럽인들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신문과 방송> 2012년 6월)고 전했다. 물론 이는 다문화적 경험을 가진 유럽에서도 극소수의 경향일 뿐이다. 음악평론가 차우진씨의 진단은 이렇다.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는 길지 않고 아이돌 음악의 역사는 더 짧다. SM엔터테인먼트의 음악은 ‘전신’이라고 할 만한, 영향력 있는 무엇이 없었다. 이런 근본 없음이 오히려 플러스로 작용했을 수도 있다. 이런저런 시도를 하며 색깔을 만들어오다가 해외 진출을 목표로 유럽 작곡가를 대거 기용해 함께 작업하는 과정을 통해 혼재된 어떤 것이 반응을 일으킨 것이다.” 강명석 <10아시아> 편집장은 ‘홍종’을 끄집어내며 이렇게 말했다. “싸이의 뮤직비디오는 미국 코미디 프로그램 〈SNL〉을 닮아 있다. 김기덕 감독은 영화제라는 오래된 방식을 통해 해외로 퍼져나갔고 싸이는 유튜브라는 새로운 형식을 탔지만 이력부터 이미 해외 대중문화적 요소가 침투해 있었다. 세대별로 교류하는 방식이 변화하는 건데 문제는 어떤 한국적인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느냐가 아니다. 김기덕에게 영향을 끼친 에곤 실레의 그림, <강남스타일>에 포함된 미국의 코미디쇼 〈SNL〉과 〈LMFAO〉 등이 김기덕과 싸이에게 어떻게 흡수되고 다시 그들의 스타일을 입고 얼마나 어떻게 퍼져나갔느냐가 중요하다.” 물론 김기덕 감독의 뚝심과 즉물적 감각, 장갑차 퍼포먼스에서 흠뻑쇼까지 대중이 모인 곳이면 한바탕 놀아젖히는 싸이의 광대 기질은 필수적인 흥행 요소다. 김기덕과 싸이, 그들의 세계는 한국은커녕 어디서도 뿌리를 찾기 어려운 혼종 대표선수다.

김기덕에게 영향을 끼친 에곤 실레의 그림, <강남스타일>에 포함된 미국의 코미디쇼 〈SNL〉과 일렉트로닉 듀오 LMFAO 등이 김기덕과 싸이에게 어떻게 흡수되고 다시 그들의 스타일을 입고 얼마나 어떻게 퍼져나갔느냐가 중요하다.-강명석 <10아시아> 편집장

“동아시아라는 공동체는 어떨까?”

우리는 온갖 ‘근본 모를 것’들의 문화적 범람을 목도하고 있다. 케이팝이라는 장르를 한국 대중음악으로 해석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케이팝의 진출을 한국 문화의 진출로 볼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한류 드라마를 보는 30대와 케이팝을 듣는 10대처럼 세대적인 문화 소비 규칙이 만들어지고 있는 상황은 확실해 보인다. 재미있는 건 이런 현상을 두고 한국에서만 유독 ‘한국의 콘텐츠’에 방점을 찍는다는 점이다. 2011년 부산영화포럼에서는 “미래에 우리 영화들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구별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며 “대신 동아시아라는 넓은 공동체는 어떨까” 하는 질문이 던져졌다.



“싸이는 가가, LMFAO처럼 세상에 없던 사람” 
싸이 제작자 양현석 YG엔터테인먼트 대표 인터뷰

» YG 엔터테인먼트 제공
싸이의 6집 앨범 작업 중 제작자로서 어떤 가이드라인을 잡았나. 
좀더 싸이다워지라고만 조언했다. 개인적인 풍파를 겪으며 음악이 예전보다 착해지는 느낌이었다. 싸이 전성기 때 모습의 재기를 바라며 이런저런 응원을 했던 게 힌트가 되지 않았을까. <새> <챔피언>에서처럼 대중이 가장 싸이답다고 생각했던 지점을 돌아보라고 했다.

유니버설뮤직과 해외 활동 매니지먼트 계약을 했는데. 
거대 매니지먼트와의 계약보다 더 중요한 지점이 있다. 스쿠터 브라운이라는 창의적인 제작자를 만났다는 사실이다. 그는 유명하지 않은 사람을 찾아서 스타를 만드는 탁월한 감각을 가진, 세계에서 가장 핫한 제작자다. 그와 함께 새로운 음악과 방송 패러다임을 만들어가는 데 싸이도 뛰어들게 됐다.

수익은 얼마나 되는가.
아직 수익 발생 단계가 아니다. 싸이가 미국 활동을 위해 홍보를 하는 처지이기 때문에 몇 달은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케이팝의 가장 큰 시장은 일본인데, 이번을 계기로 판도가 바뀔 수 있을까. 
일본은 포기할 수 없는 시장이다. 지리적으로 가까운데다 미국과 비등하게 시장이 크다. 아이돌 문화가 일본에서 건너오기도 했고. 그러나 아이돌 중심의 케이팝은 언젠가 한계가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싸이의 미국 진출로 해외 전략에 변화가 생겼는가. 
미국이나 유럽은 전략을 짜서 들어갈 만한 시장이 아니다. 아이돌 중심의 한국 대중음악과 미국·유럽의 대중음악 자체가 다르다. 그러니 가장 기본적인 음악, 차별성, 개성이 화두가 되어야 한다. 대중은 싸이에게서 코믹한 것만 본 게 아니라 이런 세 가지를 느낀 듯하다. 레이디 가가나 LMFAO처럼 이 세상에 없던 사람들이 무대를 점령해왔다. 싸이는 지금 그런 계보를 잇고 있다.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 신소윤 기자 yoon@hani.co.kr
http://h21.hani.co.kr/arti/cover/cover_general/32965.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