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9. 23. 03:21

고등학교 1학년 때다. 아침엔 맑았는데 오후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병환 중이던 아버지는 불편한 몸을 이끌고 우산을 들고 학교로 찾아오셨다. 정문 앞에 삐뚜름하게 서 계신 아버지를 발견하고 눈물인지 빗물인지 앞을 가려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그날 아버지와 아들은 우산 하나를 나눠 쓰고 겨드랑이에 서로 체온을 느끼며 집에 왔다. 아버지는 그해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떠올릴 때마다 검정 우산이 생각난다. 

중국 관리들은 자리가 높고 낮음을 떠나 다른 사람이 받쳐주는 우산을 쓴다. 시찰할 때, 연설할 때 곁에는 으레 우산 든 사람이 있다. 심지어 어린이 행사 때 어린이에게 우산을 들게 해 지청구를 듣는다. 중국인에겐 미국·러시아 대통령이 부인에게 우산을 받쳐주는 모습, 영국 여왕이 스스로 우산 든 모습이 신기하고 부럽다. 몇 해 전 원자바오 총리가 수해 현장 진흙탕에서 손수 우산을 든 사진이 그들을 감동시켰다. 

▶10년 전 서울에서 근무한 험프리 영국 대사는 초저녁 정동길을 산책하다 소나기를 만났을 때 말없이 우산을 건네준 젊은 남녀를 잊지 못한다. 관저에서 불과 10분 거리였지만 우산도 없고 비 피할 데도 없었다. 젊은 커플은 각기 우산을 갖고 있었고 그중 하나를 선뜻 내주고 사라졌다. 올여름까지 재직한 충북 음성경찰서 서장은 생일을 맞은 경찰관들에게 우산을 선물했다. 비바람을 막아주는 우산처럼 시민과 가정과 사회를 지켜 달라는 의미였다. 

▶태풍이 몰아친 그제 낮 서울 여의도 국회 정문 앞에서 40대 경찰관이 휠체어 탄 30대 남자 장애인에게 한 시간 동안 우산을 받쳐줬다. 이 장애인은 오전부터 비를 맞으며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다. '중증 장애인에게도 기본권을 보장해 달라'는 피켓을 든 채였다. 경찰관은 "오늘은 태풍 때문에 위험하니 이만 들어가고 다음에 나오시는 게 어떠냐"고 했다. 장애인은 "오늘은 내가 (시위) 담당이라 들어갈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몸이 불편해 우산도 들 수 없었다. 경찰관은 아무 말 없이 제 우산을 펴 들었다. 

▶카메라 렌즈에도 빗방울이 맺혀 어제 신문에 흐릿한 사진이 실렸지만 우산 아래 묵묵히 앉고 선 두 사람 모습이 도드라져 보였다. 지난 7월 비 오는 날에도 일본 대사관 앞에서 40대 경찰관이 위안부 소녀상(像)에 우산을 씌워주는 사진이 사람들 마음을 적셨다. 여의도엔 국민이 비 맞을 때 우산을 내미는 지도자가 있고 거꾸로 우산을 뺏는 지도자도 있다. 그걸 가려내는 일이 쉽지는 않다. 우산은 저 혼자 쓰면 겨우 비를 가리지만 남에게 건네면 아름다운 감동이 된다.



김광일 논설위원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