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날개를 찾아 나선 것은 월요일 오전이었다. 경남 통영어시장에서 5분 정도 걷자 아담한 달동네가 나타난다. 마을 어귀에 표지판이 붙어있다. ‘동피랑 벽화마을, 하얀 날개는 50m 왼쪽’. 화살표를 따라가자 잿빛 담벼락에 막 날아오르려는 자태의 날개가 보인다. 관광객들이 줄을 서 날개 그림에 등에 기대고 사진을 찍는다. 동쪽의 비탈이라는 뜻의 동피랑 마을에는 80채의 낡은 집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골목 사이로 120개의 벽화가 자리 잡고 있다. 어린 왕자와 수줍은 주정꾼, 꿈꾸는 고래와 활짝 핀 해당화…. 이 중 하얀 날개는 희망의 비상으로도 불리는 대표작이다.
동피랑은 짧은 기간에 통영의 아이콘이 됐다. 일개 달동네를 보기 위해 하루 평균 3000명씩, 일 년에 100만 명이 찾는다. 이런 작은 기적이 알려지면서 전국에 100곳 넘는 벽화마을이 생겨났다. 성공은 로또처럼 이루어진 게 아니다. 돈으로 쌓아 올린 것도 아니다. 끊임없는 생각의 에너지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지역NGO인 푸른통영21의 윤미숙(51) 사무국장 등이 창의적인 생각을 한 사람들이다. 윤씨에게서 벽화마을의 탄생사를 들어봤다.
스토리는 6년 전 시작된다. 통영시는 달동네인 동피랑을 재개발하려 한다. 마을 꼭대기에 이순신 장군이 만든 통제영의 망루 터가 있었다. 이를 복원하면서 일대에 공원을 조성하려 했다. 갈 곳이 없는 세입자들은 반발했다. 시와 주민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푸른통영21이 나선 것이다. 문화복원과 비탈마을 사이에서 고민하다 발상을 전환한다. 오래된 마을·골목도 문화재가 아닐까. 하지만 마을을 문화명소로 바꾸기 위해서는 단장이 필요했다. 지저분한 담벼락에 그림을 그리자는 제안은 그때 나온 아이디어였다.
물감 값과 인건비를 지원해줄 곳이 없었다. 마침 공고된 지역혁신 공모사업에 응모해 정부지원금을 타낸다. 고작 3000만원이었다. 동피랑의 현인들은 이번에도 새로운 생각을 해낸다. 인터넷을 통해 예술 기부 자원자를 모으기로 한 것이다. 약간의 경비만 보조해줬음에도 자원자들은 정성껏 그려줬다. 저마다 블로그를 통해 동피랑을 홍보했다. “효모를 넣은 빵처럼 빠르게 호감이 퍼져나갔다”고 윤씨는 회고했다. 그 호감의 힘으로 재개발 사업은 축소됐다. 몇 채만 허물어 망루를 만들었고 대부분의 주민은 그대로 머물 수 있게 됐다.
담벼락 벽화는 몇 년 지나면 색이 바래 흉물이 되기 십상이다. 지속 가능한 방안이 필요했다. 그래서 2년마다 그림을 다시 그리는 ‘격년 벽화전’을 생각해냈다. 지금의 그림은 지난해 봄 그려진 3차 벽화전의 산물이다. 다음 벽화전은 내년 4월에 열린다.
관광객이 많아지자 주민들이 피해를 본다. 문을 열어보거나 집 앞에 쓰레기를 버리는 데 화가 난 일부 주민은 벽화 삭제를 요구한다. 하얀 날개에 붉은 스프레이를 뿌리기도 했다. 주민에게 혜택이 돌아가게 할 묘안이 필요했다. 주민당 1만원을 거둬 생활협동조합을 만들어 카페·점방·구판장 같은 수익사업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마을기업으로 선정됐다. 이에 따른 지원금으로 맨 먼저 매출관리시스템인 POS를 설치했다. 투명한 관리야말로 자치의 토대였기 때문이다.
지난 수십 년간 재개발은 성공, 달동네는 좌절의 상징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는 정반대로 재개발이 애물단지가 돼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동피랑은 재개발과 달동네의 새로운 미래를 보여준다. 남쪽 바다 끝에서 단돈 3000만원으로 100만 명이 찾는 관광지를 만들어냈다. 가난한 사람들과의 공존과 평화도 만들어냈다. 분명 동피랑 골목에는 희망의 날개가 있다.
이규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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