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일본에서 ‘원론 찬성, 각론 반대’라는 말이 유행했다. 여당이 제시한 새로운 정책에 대해 야당이 근본적 취지에는 찬성하지만 구체적 정책수단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경우를 일컫는 말이다. 정책 시행과정에서 원론의 취지에는 쉽게 동의하면서도 정책을 집행하려고 하면 많은 논란이 빚어지곤 한다. 우리 국회도 이런 이유 때문에 여야 간에 종종 충돌한다.
박근혜정부의 상징적 국정이념이 ‘창조경제’가 됐다. 김영삼정부의 세계화, 김대중정부의 규제완화, 노무현정부의 정부혁신, 이명박정부의 녹색성장처럼 정부마다 상징적인 국정철학이 있다. 박근혜정부 출범 이후 4개월 동안 정부 출연연구소와 민간연구소, 그리고 각종 포럼의 화두는 단연 창조경제였다. 많은 정책사업에도 창조경제가 수식어처럼 따라붙는다. 새로운 창조경제시스템 구축이 박근혜정부의 가장 큰 숙제가 된 것이다.
일본이 지난 20여 년간 경기불황에서 탈피하지 못한 것은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창출하지 못한 탓이다. 반면에 미국과 영국은 1980년대 말 제조업 경쟁력에서 일본에 밀려 2등 국가로 전락하기 직전 경제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 정보기술(IT)과 금융으로 전 세계 시장을 다시 석권했다. 21세기 새로운 산업의 창출과 경제시스템의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극적으로 부활한 것이다. 일본도 금융시장 재편 등 경제시스템 개혁을 위해 노력했다. 2001년에는 정부부처를 통폐합해 거의 절반으로 줄였지만 경제시스템 개혁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원론은 알고 있는데 각론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정공사 민영화 등이 발목을 잡았고 각종 공사(公社)의 민영화나 국립대학의 에이전시화(독립행정법인화)도 집행과정에서 반쪽짜리 개혁에 그치고 말았다.
21세기는 새로운 경제시스템을 요구한다. 이미 이명박정부에서도 지식경제를 주창했지만 뿌리내리지 못했다. 유럽연합도 세계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에 들어가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모두가 세계경제의 지각변동을 예견하고 있고, 대응할 필요성도 공감하고 있지만 막상 각론으로 들어가면 변화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창조경제를 하려면 사회시스템 혁신도 함께 이뤄져야 한다. 아직도 경직된 노동시장을 유지하면서 창조경제를 논의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것과 같다. 시간제 근로, 유연 노동계약, 탄력적 고용 등 다양한 노동 시스템에 대한 국민적 대타협을 이루지 못하면 창조경제와 같은 유연한 혁신은 이뤄내기 어렵다. 정부도 제조업 중심의 대기업에 정규직 고용의 확대를 강요하는 것보다 중소기업 위주의 창의적 노동시장 활성화에 힘써야 한다. 정년까지 보장하는 고용의 안정성보다는 유연 노동시장에서도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는 사회안전망을 정부가 보장해주는 것이 창조경제에 더 걸맞다. 이런 원론적 논의에 대한 합의도 어려운데, 각론에서 각 사회집단의 이익이 충돌하면 국민적 대타협은 더욱 지난한 일이 되고 만다.
정부 조직이나 기능도 창조경제에 맞는지 고민해봐야 한다. 1960, 70년대 경제시스템에 필요했던 부처가 예산이나 인력 측면에서 아직도 주요 부처로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지난 50여 년간 우리의 경제규모가 거의 300배 정도 증가했는데 50년 전 부처가 창조경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창조경제 시스템에서는 학력 위주의 교육제도도 획기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아직도 일류대 진학을 위한 입시 때문에 초중고교생의 사교육비가 공교육 비용과 맞먹는다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대학 졸업만으로 일생의 커리어가 결정되는 것도 20세기 패러다임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21세기에는 50대도 대학을 다시 다닐 수 있고, 30대에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가도 된다. 100세 시대에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에만 대학을 다녀야 한다는 인식은 이제 20세기의 유산으로 남겨 둬도 족하다.
창조경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분야에서 획기적인 사회변혁이 필요하다. 지식도 형식지가 아니고 암묵지가 중요하고, 노동도 스페셜리스트보다는 프로페셔널이 중요하고, 조직도 경직된 계층제 조직보다는 유연한 팀조직이 중요하다. 변화에 대한 위기의식은 크지만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지 몰라 사회 전체가 방황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 김대중정부의 신지식인과 벤처산업 육성, 이명박정부의 지식경제와 국가 R&D전략기획 등 다양한 정책 시도가 별로 성공하지 못했던 것도 원론적인 문제의식은 있었지만 각론에서 지혜와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박근혜정부가 창조경제를 성공시키려면, 아니 5년 뒤 다음 정부에서 창조경제를 밀어내고 또 다른 국정이념 캐치프레이즈를 내세우는 것을 보지 않으려면, 보다 치열한 사회적 논의를 거쳐 우리 사회 전반에 걸친 획기적인 변혁을 이뤄내야 할 것이다.
염재호 객원논설위원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http://news.donga.com/3/all/20130625/5609135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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