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4일 일본 도쿄의 도로는 차량 대신 인파로 가득했다. 매년 2월 마지막 일요일에 열리는 도쿄국제마라톤에 3만6,000여명이 참가, 거리를 가득 메운 탓이다. 평소 운동을 열심히 하지 않는 탓에 마라톤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도쿄마라톤은 구경하는 것 자체가 즐거워 매년 빠지지 않고 현장을 찾는다.
도쿄마라톤에서는 정상급 선수들이 기록을 경신할지도 관심거리지만 일반인 출전자의 휴먼스토리 또한 중요한 이야깃거리다. 20대 여성이 마라톤 풀코스를 달린 뒤 남자 친구에게 프러포즈를 하고 70대 할아버지가 전년도 자신의 기록을 경신하기 위해 완주에 나서며 도호쿠(東北) 대지진으로 가족을 잃은 남성이 재기의 의지를 다지기 위해 도전하는 사연들이 소개되기도 한다. 신문과 방송은 이들의 사연을 대회 개최 수개월 전부터 집중 취재해 내보낸다. 언론은 마라톤 개최 며칠 전부터 각종 특집 프로그램을 마련, 분위기를 띄우고 국민적 관심을 유도한다. 이 같은 언론의 전방위 관심은 도쿄마라톤 성공의 또 다른 주역이다.
도쿄마라톤에는 만화 캐릭터나 영화 속 인물로 분장한 선수들도 많이 참가한다. 인기 애니메이션 포켓몬스터에 등장하는 피카츄, 인기 전자오락 캐릭터인 슈퍼 마리오 분장은 기본이다. 화장실 변기 모양의 장식품을 얼굴에 쓴 채 달리는 선수가 있고 온 몸에 방송 장비를 달고 인터넷으로 달리기를 생중계하는 선수도 눈에 띈다. 길가에 응원 나온 시민들은 최선을 다하는 이들을 큰 소리로 격려하며 선수들은 그 외침에 자극을 받아 더 힘을 낸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가 어울려 각본 없는 한편의 드라마가 완성된다고 할 수 있다.
도쿄 주민뿐 아니라 일본 열도 나아가 세계 각지에서 이 드라마의 일부가 되겠다며 줄을 서는 사람이 많다. 평소 접근할 수 없는 도쿄 시내 한복판 도로를 마음껏 내달릴 수 있는 매력이 더해지면서 올해는 일반인이 3만5,000명이나 참가했는데 출전 의사를 밝힌 지원자는 그 10배나 됐다. 일본에는 도쿄마라톤의 성공사례를 흉내 내 교토, 후지산, 구마모토 등 관광지를 중심으로 한 마라톤대회가 치러진다.
도쿄마라톤은 우익 정치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유신회 대표가 도쿄도지사로 재직하던 2007년 시작됐다. 이시하라는 2016년 올림픽을 유치하기 위한 이벤트로 마라톤 대회를 제안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국제행사를 열어 도쿄 시민의 올림픽 유치 열기를 전세계에 전달하려는 의도였다. 이시하라가 올림픽을 유치하려는 이면에는 국민을 단합해 과거 군국주의 시대로 회귀하려는 보수 우익의 노림수가 숨어있었다.
하지만 도쿄마라톤이 인기를 얻게 된 것은 그의 불순한 의도가 아니라 대회를 축제로 승화한 시민들의 현명함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도쿄마라톤 대회의 성공에 이시하라는 한껏 고무됐지만 도쿄는 정작 2016년 올림픽 유치에 실패했는데 이는 시민의 무관심 때문이었다. 생활이 어려운 마당에 돈이 드는 올림픽을 굳이 열 이유가 없다는 것이 유치 반대의 이유였다.
또 다른 우익 정치인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가 대담한 금융완화와 물가 2% 상승 목표를 내건 아베노믹스로 인기몰이에 나서고 있다. 지난해 12월 중의원 선거에서 연립여당인 공명당 몫을 합쳐 의석 3분의 2를 차지한 아베 총리는 내친김에 7월 참의원 선거에서도 3분의 2 의석을 확보, 헌법을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반면 일본 국민 대다수는 헌법 개정에 시큰둥하다. 아베 총리의 지지자들도 아베노믹스가 국민의 지갑을 얼마나 두툼하게 해줄지에 관심이 있을 뿐이다. 아베 총리의 경제 살리기가 우경화를 위한 우회전략이라는 사실이 들통나면 국민의 신뢰는 곧 추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창만 도쿄특파원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303/h201303032101558490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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