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초였다. 프랑스 중부 소도시 앙부아즈에서 프랑스어 회화를 익히며 혼자 하숙을 했다. 내가 자는 곳은 계단을 올라 이층 첫 방이었는데 독일 회사원 토마스와 함께 썼다. 하숙을 치는 60대 프랑스 아줌마가 어느 날 부엌에서 잠깐 보자고 했다. "쾅일 킴, 미안하다. 독일인과 한방을 쓰게 해서." 아무리 괜찮다고 했지만, 그녀는 동양인의 겸양쯤으로 알아들었는지 한사코 '독일인과 한방을 쓰게 해 미안하다'고 했다. 아줌마는 대신 와이셔츠를 자기가 다려주겠다고 했다. 평범한 프랑스인의 마음자리에 놓인 독일인에 대한 불편한 이미지는 그랬다.
# 1970년 12월 브란트 서독 총리가 폴란드 바르샤바에 갔다. 그는 유대인 거주지였던 게토의 봉기(蜂起) 전몰자 묘지에 헌화하다 갑자기 차가운 돌바닥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현장에 있던 수행원들이 당황했다. 한 나라의 총리가 무릎을 꿇는 일은 '사고(事故)'였다. 누군가 쉰일곱 살 총리가 현기증 때문에 쓰러졌다고 수군댔다. 하지만 브란트는 고개를 숙여 오랫동안 묵념했다. 잔뜩 흐린 날씨에 바람이 매서웠다. 브란트는 무릎 밑에 아무것도 깔지 않아 양복바지가 젖었다. 브란트는 "역사의 무게에 눌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때 행동을 했을 뿐"이라고 했다. 세계 언론은 "그날 무릎을 꿇은 것은 한 사람이었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전체였다"고 했다. 독일인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독일인의 41%는 "적절했다"고 했지만, 48%는 "너무 심했다"고 했다.
# 헤어초크 독일 대통령은 1994년 8월 바르샤바 게토 봉기 기념비 앞에서 또 잘못을 빌었다. "독일 사람이 폴란드 사람들에게 저지른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다. 헤어초크는 '독일' 혹은 '독일 정부'라고 하지 않았다. 24년 전 회의적 반응을 보였던 '48% 독일인'을 재우치듯 '독일 사람'이 저지른 행위를 사죄한다고 말했다. 훨씬 개별적이면서 포괄적이고 통세대(通世代)적인 언급이었다. '독일 정부'가 아닌 '독일 사람'이라고 하는 순간, 반성의 의무는 다음 세대로 대물림됐다. 프랑스 하숙집 아줌마의 마음까지 읽은 듯했다.
# 1984년 9월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과 콜 독일 총리가 베르됭 국립묘지에 나란히 섰다. 1차 대전 때 두 나라 젊은이 80만명이 몰살됐던 격전지다.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른편에 선 미테랑이 왼손을 내밀었고, 콜이 오른손을 뻗어 맞잡았다. 덩치가 산(山)만 한 두 정상은 행사 내내 팔짱을 끼고 다녔다. 1962년 7월 아데나워 독일 총리가 프랑스 랭스를 방문하고, 1963년 1월 아데나워·드골 두 정상이 엘리제 조약으로 화해했던 역사가 이미 쌓여 있었다. 2005년 독일·프랑스·폴란드 세 나라 젊은이 100여명이 3000㎞에 이르는 역사·문화 탐방 행사를 마쳤을 때 슈뢰더 독일 총리가 "우리 독일인은 이제 다시 유럽 대륙의 일원으로 돌아오는 행운을 잡았다"고 말하기까지 독일인들의 끊임없는 노력이 이어졌다. 그런 바탕이 있었기에 2006년부터 우리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독일 김나지움, 프랑스 리세 학생들이 독·불 공동 역사 교과서로 공부할 수 있었다.
# 메르켈 독일 총리가 엊그제 홀로코스트 유대인 대학살 추념일을 맞아 자기 웹사이트에 사죄의 글을 또 올렸다. 메르켈은 두 가지를 말했다. 첫째 "인종차별과 반(反)유대주의가 다시 발붙일 수 없도록 '모든 개인'이 용기를 갖고 기여해야 한다"고 했다. 둘째 "우리는 이 점을 '세대를 이어가며' 분명히 말해야 한다"고 했다. 메르켈은 '모든 개인'이 '세대를 이어가며' 반성하겠다는, 영원한 책임의 짐을 스스로 어깨에 얹었다.
김광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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