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4. 3. 14:22

몇 년 전까지만 해도 KT는 죽어가던 기업이었다. 전체 이익의 70∼80%를 창출하던 유선전화의 매출이 매년 10%씩 줄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내몰렸다. 휴대전화 자회사 KTF는 1위와 격차가 큰 만년 2등이었다. 새로 시작한 인터넷TV(IPTV) 사업의 앞날도 불투명했다. ‘나는 갑(甲)’이라는 거만함, 무사안일, 무(無)경쟁의 철밥통 풍토가 조직의 바닥에 두껍게 침전돼 있었다. 임원진의 절반이 낙하산을 타고 내려왔다. 간부들은 가자미눈으로 바깥을 바라봤다. 승진하려면 역량과 성과를 입증하는 것보다 외부의 힘을 동원하는 쪽이 더 확실했기 때문이다.

관료 시절 ‘개혁 전도사’라고 불리던 이석채 전 정보통신부 장관이 2009년 1월 KT 회장으로 취임했다. 취임 직후 직원 3만여 명 중 6000명을 내보내는 인력 구조조정부터 시작했다. 인재경영을 내세우며 인사 외풍을 차단했다. 스마트폰을 들여와 스마트혁명의 불을 댕겼고 KTF와의 합병을 통해 유무선 융합을 시도했다.

조직의 변화가 알려지면서 작년부터 국내외에서 각종 상(賞)을 28회(법인 19회, CEO 9회)나 받았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집무실에서 만난 이 회장은 “기업엔 상보다 실체가 중요하다. 실상은 기대에 많이 못 미친다. 사실 ‘뛰어난 기업’이라기보다 경영혁신과 인재경영을 평가받은 것이다”라고 말했다. 

첫 질문으로 ‘취임 직후 단행한 6000명 구조조정은 너무 가혹하지 않았나’ 하고 물었다. 그는 “청년실업 해결을 위해”라는 거대담론으로 대답했다. 


○ 청년실업 해결 위해 노동시장 유연성 높여야

“청년실업 문제가 심각하지만 일자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좋은 일자리가 없다는 뜻이다. 노동시장이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분돼 있기 때문이다. 좋은 일자리는 선점됐고 진입구가 너무 좁다. 젊은이 중 극소수만 통과한다. 나머지는 ‘을(乙)의 일자리’로 가야 한다. 일자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행복하지 않다. 정년이 되면 생산성이 떨어진 상태에서 밀려 나간다. 미래가 막막하다. 젊은이들이 안 들어오니 회사는 노쇠해진다. 물에 비유하면 순환이 안 되고 썩는다. 해법이 있다. 생산성이 떨어진 사람들이 자리를 비워주고, 젊은이들이 그 자리를 채우는 구도로 바꾸는 것이다. 젊은이 몫이던 ‘을 일자리’를 퇴직자들이 채우는 것이다. 젊은이들은 희망을 찾고, 나가는 사람들도 비록 예전 같지는 않지만 생산성에 맞는 대우를 받으며 계속 일할 수 있다. 기업은 경쟁력을 되찾는다. 사회 전체가 ‘위너’가 된다. 우리 사회가 가야 할 길 아닌가. 우리는 한국을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세대다. 젊은이들이 이런 좌절을 겪으라고 우리가 땀 흘린 것 아니다. 청년들이 미래에 대해 희망을 품고 신나게 도전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했던 것이다. 이런 구상을 가지고 구조조정을 단행했고 나름대로 성과를 거뒀다.”

청년실업과 관련해 그는 최근 “해결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며 “정치권이 뻔히 알면서도 기득권 노조의 조직화된 표를 잃을까봐 눈치만 보고 있다. 이들이 청년 일자리의 적(敵)”이라며 작심하고 정치권을 질타했다. 그는 “이 문제는 궁극적으로 법과 제도로 풀어야 하지만 안 되고 있다. 그래서 KT 모델을 본 후 ‘저렇게 하면 되겠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고, 결국 법 제도가 따라오기를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구조조정 후 KT에는 과거보다 6∼7배 많은 청년이 입사한다. 그중 30%는 고졸이다. 퇴직자 6000명 중 2500명은 재취업했다. 

그는 공무원으로 정책적 판단을 할 때 ‘나라에 무슨 도움이 되느냐’는 잣대를 매번 들이대던 사람이다. 요즘 그는 2개의 잣대를 쓴다. 하나는 나라에 도움이 되느냐. 다른 하나는 KT가 돈 버느냐다. 

―이 회장은 경제공무원으로 출발했지만 장관은 정통부에서 했고, 이제 전문경영인으로 변신했다.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청년들에게 어떤 얘기를 해주고 싶나.


○ 정보-통신 융합해 새 성장동력 창출할 것

“세상이 힘들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 아니다. 미래는 스스로 만드는 거다. 현실에 짓눌리지 말고, 스스로 그리는 꿈을 위해 도전하라는 메시지를 주고 싶다. 우리가 출발할 때는 더 암담했다. ‘엽전은 별 수 없다’는 자조(自嘲)가 만연했고 패배주의적 종속이론이 횡행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미래가 열렸다. 현재의 족쇄에 묶이지 말라. 현재를 바탕으로 미래를 예단하지 말고 나름대로 인생설계를 해서 힘들더라도 도전하라. 그러면 새로운 미래가 열린다. 젊은이가 있는 자리에서는 항상 이런 얘기를 하고 다닌다.”

―KT는 신입사원 퇴사율이 높은 회사로 알려졌다. 

“어느 회사든 기업문화가 있다. KT의 조직문화가 자유롭고 창의적인 직장생활을 원하는 사람에게 안 맞을 수도 있다. 혹은 ‘아, 내가 이렇게 힘들고 빛 안 나는 일을 하러 왔나’ 하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을 것이다. 그중 후자, 즉 기대했던 일이 아니어서 실망했다면 나는 ‘감수하라’고 말한다. 어디든 현장은 고되며 고객을 위해 땀을 흘려야 한다. 문제는 전자, 즉 선배나 조직의 행태에 실망해 나가는 것이다. 이를 고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실인지 최근에는 KT 신입사원의 퇴사율이 이른바 초일류 기업보다 낮다. 퇴사자를 줄이는 수준이 아니라 신입사원이 보람을 느끼고 정열을 불태울 수 있도록 조직문화를 업그레이드하는 게 목표다.”

―올해 초 연임해 2번째 임기를 시작했다. 이번 임기의 중점 목표는…. 

“취임 직후엔 죽어가는 기업을 되살리는 게 중요했다. 아직 성공한 건 아니고 돌파구만 열었다. 이번 임기 때는 스마트 혁명, 즉 ICT(정보통신기술) 융합에 의해 새로 태어나려 한다. 이를 통해 새로운 성장동력과 일자리를 창출하려 한다. 가상재화(Virtual Goods·전자책 음원 동영상 게임 앱 등 네트워크 위에서 생산 유통 소비되는 디지털 상품) 시장에 주목해야 한다. 이 시장이 형성되면 젊은이들이 취업보다 창업을 많이 할 수 있게 된다. KT는 물론이고 한국이 재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KT로서는 한국의 ICT 컨버전스 리더가 아니라 글로벌 리더로 재탄생한다.”


○ 제3의 물결은 스마트네트워크 통해 시작

―스마트 혁명의 본질이 뭔가.

“보는 각도에 따라 스마트다, 네트워크다, 컨버전스다 하고 달리 부르지만 결국 동일한 현상이다. 지금까지 생각하지 않았던 산업과 활동이 온라인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휴대전화가 보급되면서 IT(정보기술) 혁명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맛보기일 뿐이다. 책상에 앉았을 때만 컴퓨터를 썼고 책상을 떠나면 멀어졌다. 이 때문에 일부는 실망도 했다. 이제 언제 어디서나 네트워크에 연결된다. 이것이 진짜 혁명이다. 쇼핑 학습 의료 에너지 등 어디까지 확산될지 모른다. 1980년대 앨빈 토플러가 말한 ‘제3의 물결’, 정보화 혁명이 이제 제대로 시작되고 있다. 스마트화는 정보화 혁명의 완성이 아니라 시작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IT라는 말이 일반적이었다. 컨버전스에 대한 공감이 확산되면서 용어도 정보(Information)와 통신(Communication)을 병기한 ICT로 변화한 것 같다. ICT 산업이 맞은 가장 큰 도전은 뭐라고 보나.

“첫째, 네트워크다. 정보화 진전으로 디바이스(기기) 사용자인터페이스 운영체제(OS) 등은 아주 발전했다. 이 모든 것이 연결돼야 제대로 기능한다. 스마트TV라고 하지만 스마트 네트워크에 연결돼야 스마트하지, 그렇지 않으면 바보상자에 불과하다. 에너지 절약을 위한 스마트그리드도 네트워크 위에 있을 때만 의미를 갖는다. 제3의 물결은 스마트 네트워크를 통해 일어난다. 그래서 네트워크 혁명이다. 하지만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사람들이 잘 못 느낀다. 누가, 얼마나, 어떻게 네트워크를 가꿔야 할지 생각지 않는다. 인프라를 주어진 것으로 보며 내가 해야 한다는 생각을 못한다. 둘째, 보안이다. 네트워크를 잘못 다루면 프라이버시가 무너진다. 예컨대 국방도 ICT로 옮겨갈 텐데 보안이 가능할지가 중요한 과제다. 네트워크의 보안성을 시험해보고 싶어 하는 ‘철없는 천재’가 너무 많지 않나.” 

―네트워크가 너무 잘 깔려 있어 사용자들이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 가장 좋은 것 아닌가. 마치 수돗물이 어떻게 생산되고 운반되며 배분되는지 알 필요 없이 물이 필요하면 그저 수도꼭지를 트는 것처럼….

“그게 오래 못 간다. 당장의 전력 부족 문제를 봐라. 안일하게 생각하다 보니 문제가 왔다. 원하는 대로 쓰기만 해서는 위기에 봉착한다. 네트워크도, 주파수도 마찬가지다. 결코 무한하지 않다. 개발을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LTE(롱텀에볼루션)망 하나 건설하려면 4조 원이 들어간다. 이 투자비가 회수도 안 됐는데 또 다른 망을 건설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나. 또 지금 주파수를 맘대로 나눠주면 나중에 쓸 게 없다.” 

이 회장은 거대담론뿐만 아니라 디테일에 매우 강하다. 기술적인 내용도 KT 엔지니어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철저하게 공부한다. 그리고 거대담론과 디테일을 교직(交織)해서 조리 있게 설명하는 재주가 있다.

―KT는 작년 2월 BC카드를 인수했다. 금융업을 하겠다는 건가. 

“BC카드는 다른 카드회사와 다르다. 카드 발행은 회원은행이 하고 BC카드는 거래처리만 해준다. 즉 금융-통신의 융합을 통해 회원금융사를 제대로 지원하겠다는 것이다.” 


○ KT선 충성도 아닌 능력과 됨됨이가 중요

―경제민주화 논의의 핵심에 대기업집단, 이른바 재벌 문제가 있다. 재벌 체제가 문제되자 기아자동차, 유한양행 등의 모델이 주목받았다. 하지만 결국 대안이 되지는 못했다. 

“KT가 있잖나. KT의 경우 매년 경력자를 350명씩 뽑는다. 임원도 40%가 외부 출신이다. 대주주가 있는 회사, 재벌 경제에서는 힘든 일이다. (기업 내에) 충성도가 중요한 섹터가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KT에는 (재벌식 약점이 없기 때문에) 충성도가 아니라 능력과 됨됨이가 중요하다.”

―KT를 주목하는 시선이 늘어나고 있지만 이석채가 떠나면 함께 사그라질 ‘이석채 바람’이 아닌가 궁금해한다. 개혁성과가 정착될 것이라 보나. 

“밖에서 흔들지만 않으면 된다. 믿어 봐라. KT의 성공에 그치지 않고 한국 경제에 새 바람을 일으킬 수도 있다. 청년실업과 재벌 문제에서.”

―정보통신부 부활에 찬성하나.

“당연하다. 국무회의에서, 국회에서 전문적 식견과 책임을 가지고 얘기할 수 있는 전담 부처가 있어야 한다. 변화를 내다보고,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 얘기하는 부처가 필요하다. 규제도 해야겠지만 대변하고 대비하고 필요할 경우 지원하는 기능이 있어야 한다. 소프트웨어 산업이 한국에서 크지 않는 데 대해 문제제기를 하는 부처가 꼭 필요하다.”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정치에 바라는 게 있다면….

“정치는 기본적으로 현실이지만, 또한 미래를 열어가는 역할을 해야 한다. 우리 정치를 희화화하는 일이 많은데 정말 우리 정치가 그렇게 불량품이었다면 지금의 한국은 없다.”



허승호 논설위원



http://news.donga.com/3/all/20121210/51453839/1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