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3. 15:55

해발 수천m '유럽의 지붕' 오르려 열차표 사면 '신라면컵 쿠폰' 줘
올 중국 매출 증가율 40% 넘어… 우리 맛으로 경쟁해 일군 결실…
'안전 이상 무' 밝혀진 리콜 사태, 國益에 큰 손실 미친 사례 될 것

농심 유종석 부사장의 37년 직장생활은 라면 외길 인생이다. 1970년대 중반 입사 당시 국내 식품업계는 기술도 자본도 없던 때였지만 그는 라면 제조와 판매의 한길만 걸어왔다. 몇년 전 유럽여행을 떠난 아들의 국제전화 한 통은 그의 인생에서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아빠! 제가 지금 스위스 알프스 융프라우에 와 있어요. 그런데 이곳에서 신라면컵을 팔아요. 서울 맛 그대로예요." 그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척, 함께 기뻐했다. "아들이 비로소 아버지 회사와 한국에 대해 자긍심을 갖게 된 것 같아서였지요."

해발 수천m '유럽의 지붕'인 융프라우는 산악열차로 2시간가량 올라간다. 컵라면이 팔리는 곳은 정상 전망대 상점이다. 열차 티켓을 사면 신라면컵 무료 쿠폰을 준다. 공짜는 여기까지다. 뜨거운 물은 4프랑, 젓가락은 1.5프랑으로 우리 돈 6500원을 더 내야 한다. 온갖 피부색의 지구인들이 하얀 만년설을 배경으로 신라면, 육개장 사발면의 면발을 훅훅 불어가며 후루룩 먹는다. 이곳에서는 요즘도 매일 1000개가 넘게 팔린다.

농심 상하이(上海)공장은 1996년 가동을 시작했다. '14억 중국인이 농심 신(辛)라면의 매운맛에 푹 빠지게 하겠다'는 목표를 실천 중이다. 지난 8월 현지에서 만난 조인현 농심 중국총대표는 "중국 진출 15~16년 만에 중국인들이 비로소 신라면 맛을 알기 시작했다"며 기뻐했다.

느끼한 맛에 익숙한 그들에게 매콤한 맛을 전달하는 과정은 힘들었다. '더운물 부어 훌훌 마시는 것'에 익숙하던 그들에게 '라면 맛은 팔팔 끓여 조리할 때 극대화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 고생 끝에 보람이다. 올해 중국 내 매출 증가율은 40%가 넘는다. 중국 현지에서 가장 인기있는 대만계 캉스푸(康師傅)의 최고가 라면은 2.2위안이지만, 농심 신라면은 3.5위안으로 50%나 비싸다.

전 세계 80여 개국에 수출되는 농심라면은 우리 맛으로 승부해 일군 의미 있는 결실이다. "미국에서는 미국 라면, 중국에서는 중국 라면, 일본에서는 일본 라면으로 맛을 현지화했다면 농심라면은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 할 정도로 맛에 관한 한 농심은 고집불통이다.

세계 어느 나라나 식품위생 관리 잣대는 엄격하다. 미국은 농무부·FDA·세관이, 영국과 유럽 국가들은 WTO·EU 검역 규정을 철저하게 밟는다. 호주는 연방정부 소속 검역원이 초기 검사 후 이상이 있다고 판단하면 이후 일체의 실험·방제 비용을 수입업자와 제조사가 부담해야 한다.

농심은 1965년 9월 창립했다. 이미 삼양라면·풍년라면 등 7개 선발주자가 버티고 있었다. "창업 초창기 우리의 발길은 선발주자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도시) 변두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이윤은 박하고 가격 규제도 심해 한때 존망의 기로에 서기도 했습니다."(창업자 신춘호, '농심 40년사') 농심의 기업사는 국내에서조차 변두리를 맴돌다, 품질 승부 끝에 세계 80여 개국에 우리 맛으로 진출한 성공스토리다.

농심은 최근 '발암물질(벤조피렌)' 파동으로 국내외에서 리콜사태를 겪고 있다. 경제적 손실을 떠나 이미지 타격이 이만저만 아닐 것이다. 소비자들이 불안감을 느낀다면 정부는 당연히 리콜을 유도해야 한다. 하지만 정부 스스로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밝힌 만큼 이번 사태는 정부가 소중한 글로벌 식품기업의 이미지를 손상했고, 궁극적으로 국익(國益)에 큰 손실을 끼친 사례로 기록될 것이다. 정부와 소비자 모두 글로벌 식품기업 하나 만들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닫는 계기가 됐으면 한다. 우리 스스로 농심을 융프라우에서 내려오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이광회 산업부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6/2012110602852.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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