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1. 3. 15:53
지난 주말 경남 밀양에 다녀왔다. 765㎸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농성장은 천혜의 아름다운 산세를 뽐내는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잘린 소나무 밑동 주변에는 주민들이 시공사 쪽 헬리콥터와 벌인 힘겨운 사투의 흔적이 남아 있고, 노란 깃발들이 따뜻한 볕을 쬐며 펄럭이고 있었다. “핵발전소를 더 짓지 않으면 만들지 않아도 될 초고압 송전탑” “밀양 송전탑-우린 반댈세” “펑펑 써대지 않고 아껴 쓴다면” “우리는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다!” 한 마을 어귀의 “우리 마을에 강도가 들었다!”라는 문구가 특히 눈길을 끌었다.

 

이곳 주민들 중에는 은퇴자나 한창 일할 나이에 암이 걸려 여기서 평화로운 제2의 삶을 시작한 분도 적지 않았다. 평화롭게 살아가던 이 소시민들은 이번 일로 그야말로 난데없는 습격을 받았고, 그래서 모두가 정치적 생태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자신을 위해, 그리고 후대를 위해 핵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결심이 대단했다. 귀경길에 핵발전소 유치를 강행하려던 삼척시장의 주민소환이 투표율 25.9%로 무산되었다는 뉴스를 들었다. ‘추방’ ‘배제’ ‘강제’와 같은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이 현장들이 바로 최근 인문사회학계의 핵심 주제가 되고 있는 ‘죽임의 생명정치’가 벌어지는 곳 아닌가!

 

핵발전소, 정말 더 짓는 것 외에 방안이 없을까? 핵산업은 사실상 1960년대에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그것이 위험한 판도라의 상자라는 것에 동의가 이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석유파동(오일쇼크)과 오존층 파괴로 환경문제가 대두되는 틈에 클린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핵발전 사업은 다시 일어났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를 겪으면서 재생에너지에 대한 관심이 커지긴 했지만 여전히 핵에너지 산업은 엄청난 홍보와 로비로 위기를 넘겼다. 일본 후쿠시마 참사 이후 다시 “핵 없는 세상”에 대한 논의가 일고 있다. 독일은 2022년까지 핵발전소 100% 폐쇄라는 대국민 협약을 대대적인 공개 티브이토론을 통해 이루어냈다. 핵발전이 초래할 본질적인 안전성 문제뿐 아니라 십만년을 보관해야 하는 폐기물 문제로 ‘세대 간 형평성’에 대한 논의가 진지하게 이루어졌다고 한다. 스위스는 2034년까지 폐쇄를 결정했고 핀란드는 추가 건설 계획을 포기했다. 이탈리아도 국민투표 결과에 따라 핵발전소 건설 계획을 전면 취소했다. 이들 국가는 모두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 나라들이다. 그 나라 국민들은 ‘무한 성장’을 전제로 한 ‘근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인식하고, 돈은 덜 벌어도 행복하게 어우러져 살아갈 후기 근대적 삶으로의 전환을 서두르고 있는 것이다.

 

국민 1인당 전기 소비량이 유럽과 일본보다 월등히 높은 한국은 왜 이렇게 잠잠할까? 한국이 선진국 대열에 들기를 원한다면 본격적으로 재생에너지 장단기 계획을 수립해야 할 것이다. 이미 원전 의존도가 너무 높아져 버렸다거나 원전 수출로 외화를 벌어야 한다는 등의 패배주의와 패권주의적 변명으로 이를 지연시켜서는 안 된다. 일본도 지난달 재생에너지 생산과 에너지 유통 효율화 등을 두고 에너지 장기계획을 내놓았다. 중국은 이미 솔라패널 대량수출을 하고 있으며 지속적으로 풍력, 태양광과 태양열 에너지와 유통에 투자할 것이라고 한다.

 

당장 모든 것을 중단하자는 것이 아니다. 방향을 정하자는 것이며, 국민과 국가와 기업이 협약을 맺자는 말이다. 위험한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 국민들을 삶의 터전에서 몰아내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에너지 문제를 풀 해법은 나와 있다. 에너지를 적게 쓰고 에너지원을 제대로 전환해 내면 된다. 솔직하고 진지하게 모여 앉으면 모두 잘 풀 수 있는 문제다. 밀양 농성장에서 만난 주민들은 활기에 차 있었다. 함께 싸우며 시대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죽음의 생명공학’을 간파하고 ‘살림의 생명정치’로 나아가는 길을 내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말한다. “고마 요대로 살고 싶다!” 그냥 이대로 살기 위해 결단을 할 때다. 지금 교수들 사이에 탈핵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지성의 상아탑이 아직 건재함을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조한혜정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55928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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