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12. 26. 11:32

『한국의 황제 경영vs 일본의 주군 경영』이란 책을 낸 서울대 김현철 교수의 강연을 며칠 전 들었다. 그는 한국의 경영 특징을 황제 경영, 일본은 주군(主君) 경영이라 명명했다. 한국은 오너가 전권을 가지고 경영권을 행사한다. 반면 일본 경영자는 ‘존재하지만 군림하지는 않는다’며 실질적인 경영에는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주군은 봉건시대 영주를 뜻하는 일본식 표현이다.

몇 년 전만 해도 일본은 “한국이 일본에 파는 건 소주와 김치, 여자뿐”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180도 달라졌다. 드라마 등 한류도 원인이었지만, ‘삼성 쇼크’가 결정적인 계기였다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삼성전자의 이익이 일본 9개 전자업체의 총 이익보다 훨씬 많았던 2009년 2분기의 경영 실적 얘기다. 소니, 파나소닉, 도시바 등은 40년 가까이 세계를 주름잡았던 전자업체였다. 또 일본은 국내 전자업체의 스승이었다. 1950~60년대 전자산업에 처음 뛰어들 당시 일본 업체들의 자본과 기술을 도움 받았다. 게다가 일본의 전자산업에 대한 애정은 특별했다. 자신들이 패전한 건 미국의 전자산업 때문이라고 생각했기에 50년대부터 거국적으로 육성한 산업이었다. 이런 자존심에 삼성전자가 깊은 생채기를 냈으니 일본의 충격은 대단할 수밖에. ‘전자 총 붕괴’ ‘한국 경계령’이 쏟아졌던 배경이다.

일본의 원인 분석이 시작됐다. 기업 구조는 차이가 없었다. 일본도 우리처럼 그룹 경영 시스템이다. 하지만 계열사 수는 우리보다 더 많다. 일본은 웬만한 대기업도 100개가 넘는 계열사를 거느리지만 우리는 많아야 60~70개다. 계열사 간 출자 역시 똑같다. 오히려 일본이 더 심하다. 순환출자는 물론 우리는 진작부터 금지한 상호출자도 일본에선 예사다.

김 교수는 유일한 차이점이 황제 경영과 주군 경영이라고 설명한다. 전권을 쥐고 경영권을 행사하는 리더가 있느냐는 점이다. 한국은 오너가 그 일을 하지만, 일본은 그런 리더가 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의 분석도 마찬가지다. 한국 기업이 잘나가는 건, 그럼으로써 한국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재빨리 극복한 건, 신속한 의사결정과 미래를 내다본 장기 투자 덕분이라는 지적이다. 바로 오너 체제 얘기다. 그런데 어쩌랴. 남들은 칭찬하는데, 우리 내부에선 개혁 대상이니 말이다.

기업 지배 구조에 글로벌 스탠더드는 없다는 건 정설이다. 그룹 경영과 오너 지배 구조도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경영 시스템이다. 독립기업과 전문경영인 체제가 정답이 아니란 얘기다. 그런데도 우리는 ‘재벌개혁’ 하면 오너 지배 구조부터 문제 삼는다. 1% 지분율로 100% 경영권을 행사해선 안 된다고 하면서. 문재인 후보가 어제 내놓은 재벌개혁안이 그 방증이다. 다른 후보들도 대동소이하다. ‘재벌개혁’ 하면 출자총액제한제 부활과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부터 들고 나온다.

현행 재벌 체제에 문제가 없다는 건 결코 아니다. 재벌의 지나친 탐욕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에는 동감이다. 이타(利他) 없는 이기(利己), 양심 없는 경제는 온전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다. 가령 대-중소기업 간 불공정 거래는 시정되는 게 옳다. 물론 이는 재벌 체제만의 문제는 아니다. 재벌 아닌 애플도 불공정 거래가 예사다. 중국 폭스콘과의 거래가 그렇다. 근본적으로는 원청-하청업체의 영원한 숙제다. 그렇더라도 불공정 거래는 사라져야 한다. 재벌그룹이 빵집을 못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안 하는 게 좋다. 기업 경영에도 강자가 지녀야 할 금도(襟度)라는 게 있기 때문이다. 법치주의도 강화돼야 하고, 기업을 이용해 오너 가족이 사익(私益)을 챙기는 것도 막아야 한다.

재벌개혁은 여기까지여야 한다. 불공정 거래와 불공평한 법 집행, 오너 가족의 사익 편취만 규제하면 된다. 더 나가선 안 된다. 신속한 결정과 장기 투자라는 황제 경영의 강점을 우리 스스로 무너뜨려선 안 된다. 재벌개혁의 초점이 지배 구조가 돼선 안 되는 이유다. 실효도 없고, 경제민주화와도 큰 관련이 없다. 순환출자 금지가 양극화 해소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생각해보면 금방 알 일이다. 이러다가 암탉의 배를 가르는 우(愚)를 범할 것 같아 그게 걱정이다.

김영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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