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자매대학에서 여름방학 집중강의를 하고 돌아왔다. 찜통인 도쿄 거리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지하철에서도 손바닥만한 책을 들고 삼매경에 빠진 시민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한 마디로 독서천국 같았다. 일본서적출판협회에 따르면 지난 한 해 동안 약 7만6,000종의 새 책이 출간됐고, 모든 서적의 판매부수가 11억7,600만권에 달했다. 대략 3,800여개의 출판사들이 매년 1조8,000억엔(약27조원) 규모의 거대산업을 형성하고 있다.
전국 1만5,000여개의 크고 작은 서점들이 출판 시장의 모세혈관 역할을 수행한다. 서적출판협회를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전철역이든 쇼핑몰이든 일본에서 서점을 찾기 어려운 곳은 없다." 요즘 들어 주춤해졌다곤 하나 여전히 출판대국인 나라의 깊이를 여러 곳에서 감지할 수 있었다. 우리가 한류니 K팝이니 하면서 하루아침에 문화국가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 있는 동안 무엇을 잊고 무엇을 잃었는지 자성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텔레비전, 인터넷, 모바일이 커뮤니케이션의 성격을 신속하고 수평적으로 만들었지만 아직도 인간 이성의 정수를 포착하는 데 있어 책 만한 도구가 없다. 부피와 무게에서 휴대용 전자기기에 약간 밀릴 뿐, 사용의 편의성이나 영구적인 보관성을 감안하면 아직까지도 책에 대적할 수단이 없다. 구형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해 놓은 원고는 이제 그것을 읽을 수 있는 기계조차 없지만, 그 원고로 만들어진 책은 여전히 필자의 책장에 꽂혀 있다. 어느 쪽이 우월한 매체인가. 또 책 읽기는 단순히 개인의 문화적 취향 또는 여가활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근대 이후의 독서행위는 본질적으로 정치적인 행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을수록 개개인의 내면의 공간이 늘어난다. 그러므로 책 읽는 시민들로 이루어진 나라는 국토면적과 상관없이 엄청난 지성의 영토를 보유한 대국이 된다. 지성의 영토가 광대한 나라일수록 독재가 불가능하고 궤변이 설 자리가 없으며 프로파간다의 맨얼굴이 쉽게 폭로된다. 이런 점에서 책 읽는 행위는 인간의 권리문제로 접근해야 마땅하다. '우매한 대중이 되지 않을 권리'는 인간 자력화의 가장 강력한 요구에 속하는 권리다. 인권의 원칙으로 보아 책 읽을 권리에는 세 차원이 있다.
첫째, 가용성의 원칙. 일단 책의 종류가 다양해야 하고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어야 한다. 저렴하되 출판사의 출혈을 방지할 정책이 필요하다. 도서정가 문제, 우수출판 지원제 등을 인권의 차원에서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 문고판 도서의 활성화도 고려해 봄직하다. 문고판은 공간활용, 가격, 제작 등에 있어 장점이 많지만 출판사의 수익성이 떨어지는 분야다. 정책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서울역의 노숙인들도 문고판으로 성석제의 소설을 쉽게 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둘째, 적합성의 원칙. 다양한 책이 나오되 일정한 수준의 도서를 지향해야 한다. 도서시장은 악화가 양화를 쫓아낼 가능성이 높은 곳이다. 이와 더불어 금서니 불온서적이니 하는 사상검열을 원천적으로 없애야 한다. 책을 읽는 목적 자체가 인간사유를 넓히고 바꾸는 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불온'하지 않은 책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셋째, 접근성의 원칙. 동네의 작은 책방을 지원할 수 있는 제도가 있어야 하고, 전국 방방곡곡에 공립 도서관이 촘촘히 들어서야 한다. 이미 도서관 운동들이 있지만 이런 분야에 대폭적인 정부 지원을 하는 것은 그야말로 세금이 아깝지 않은 일이다. 또한 장애인들을 위한 도서제작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시각장애인용 도서 콘텐츠 생산은 시급한 인권문제이며 국가인권위에서 오늘이라도 당장 조사와 연구를 시작해야 할 사안이다.
올해는 '독서의 해'이다. 많은 아이디어들이 제시되어 있지만 책 읽기를 인권문제로 이해하는 관점은 아직 자리잡지 못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책이야말로 인간자유를 위한 강력한 무기"라 했다. 인권운동으로서의 독서운동이 일어날 때가 됐다.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
http://news.hankooki.com/lpage/opinion/201208/h2012080721035924370.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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