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런던에 갈 일이 있었다. 취재차 만난 분이 “재미난 곳을 보여주겠다”며 데려간 곳은 런던 동쪽 템스 강변의 한 허름한 벽돌 건물이었다. 얼핏 봐도 ‘부촌’은 아닌 듯한 변두리 동네였다. 건물 이름은 와핑 프로젝트(Wapping Project). 1890년 세워져 이제는 쓰지 않는 수력발전소라고 했다. 안에 들어가자 절로 입이 벌어졌다. 널찍한 실내엔 19세기에 쓰던 발전소 기계들이 곳곳에 놓여 있었다. 현대식 의자와 탁자가 벌겋게 녹슬고 누런 기름때가 낀 펌프와 터빈 사이에서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2000년 호주 출신 영국인이 사들여 레스토랑과 전시장·서점 등으로 리모델링했단다.
영국인들의 ‘발전소 재활용’은 화력발전소를 리모델링한 미술관 테이트 모던으로 이미 친숙하다. 와핑 프로젝트의 별명은 ‘베이비 테이트(Baby Tate)’. 테이트 모던보다 규모는 훨씬 작은 ‘아기’지만 재활용 면에선 어찌 보면 더 어른스럽다. 외관만 두고 내부를 완전히 다 바꾼 테이트 모던과 달리, 120여 년 전의 기계와 설비 등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현대식 집기, 조명과 섞는 연출을 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 옛것과 새것의 사이 좋은 공존이자 과감한 문화실험이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공간의 역사로 흘러갔다.
“여기가 런던 시내 호텔과 극장에 있는 발전기용 물을 대던 세계 최초의 물공급 공장이었대요.”
“7년간 개·보수한 비용이 400만 파운드(약 65억원)가 들었다죠.”
“그걸 다 개인이 부담을?”
“모금도 하고 문화보존단체 지원도 받았다네요.”
불현듯 외국인 관광객 1000만 명 시대의 서울을 떠올렸다. 그들이 “서울에서 재미난 곳이 어디냐”고 물었을 때 어디로 데려갈 수 있을까. 홍대앞과 가로수길, 삼청동길 정도? 그런데 가로수길과 삼청동길은 옷가게와 식당 위주다. 소비지향성이 강하다. 홍대앞도 ‘젊고 가난한 예술가들의 거리’라는 역사를 설명하기가 무색해진 지 한참이다.
관광자원은 건물·장소 등 유형의 것이기도 하지만 문화·역사 등 무형의 것이기도 하다. 대상에 얽힌 풍성한 이야기가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홍대앞과 가로수길 다음 차례가 될 서울의 명소는 이런 이야기가 있는 곳이어야 하지 않을까. 올 초 정부가 당인리화력발전소에 복합문화공간을 만든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와핑 프로젝트 같은 재미난 공간이 나올 수 있을지 기대된다. 다만 민간의 자생적 움직임이 아니라 정부가 테이트 모던처럼 하겠다고 나선 터여서 다소 걱정도 된다. 어쨌든 당인리가 다시 태어나면 우리가 나눌 대화는 이런 걸 거다.
“1930년 경성 시내에 전기를 공급하려고 만든 한국 최초의 화력발전소였다죠.”
“서울 시민들에겐 유서 깊은 곳이겠네요.”
“‘마포종점’이란 오래된 유행가에 ‘저 멀리 당인리에 발전소도 잠든 밤’이란 구절이 나왔을 정도니, 아무래도 그렇겠죠?”
기 선 민 중앙SUNDAY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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