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유명 파티시에(제빵제과사) 피에르 에르메씨는 서양과자 마카롱의 맛과 멋을 예술적 경지로 끌어올려 부와 명예를 얻은 인물이다. 런던·도쿄·두바이에 분점이 있어 출장이 잦지만 주말만큼은 철저히 가족과 함께 지낸다. 며칠 전 영국의 경제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가 그의 주말 일과를 소개했다. 토요일 오전엔 중학생 딸, 아내와 함께 거리 장터에 가서 유기농 채소와 생선을 직접 사고, 카페에서 브런치를 먹는다. 토요일 오후의 주된 일정은 미술관 나들이다. 일요일 오전엔 집 근처 수영장에서 딸은 수영을, 부부는 사우나를 즐긴다. 일요일 저녁엔 집에 부부동반으로 손님을 초대해 자신이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며 수다를 떤다….
서울 사람들의 주말 풍경은 어떤가. 강남에 사는 대기업 임원 A씨는 몇 달째 토요일에도 출근하고 있다. 경기침체로 매출이 떨어지면서 회사가 비상경영 체제에 돌입했기 때문이다. 여가가 없기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피서철인 요즘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인 대치동의 교통체증은 평소보다 더 심하다. 중·고등학생 학원 수강생을 실은 차량 행렬이 수도권 각지에서 몰려와 꼬리를 물기 때문이다.
재정 위기 탓에 유럽 경제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는 있지만, 개인의 삶의 질로 보면 유럽은 여전히 지구촌 최고의 생활 선진국이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자들은 미국인들에 비해 '덜 일하고 많이 노는' 유럽식 사회경제 모델이 한계에 봉착했다고 지적한다. 그런데 정작 유럽인들은 해고가 자유롭고 끊임없이 경쟁에 내몰리는 미국인들보다는 자기네 삶의 질이 더 낫다고 본다. 유럽인들이 유럽식 사회경제 모델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근거 중 하나는 경제학자들이 약점으로 꼽는 바로 그 근로시간이다. 미국인의 연간 근로시간은 1681시간(2011년 기준)인 반면 프랑스·독일 근로자의 근로시간은 1400시간대에 그친다.
유럽인들은 일에서 자유로운 시간에 집에서 요리를 하고, 아이들과 놀아주거나 이것저것 직접 가르친다. 그런데 이런 가사노동과 보육활동이 생산하는 부가가치는 GDP(국내총생산)엔 반영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유럽인들은 GDP라는 지표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이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미국 컬럼비아대 스티글리츠 교수에게 의뢰해 '행복 GDP' 개념을 새로 만들어냈을까.
유럽인들이 주말을 맘껏 즐길 수 있는 요인은 뭘까. 다양한 분석이 가능하겠지만 적게 일하고도 많은 수익을 뽑아내는 고(高)부가가치형 노동에 그 비결이 있는 것 같다. 앞서 예로 든 피에르 에르메씨는 1개당 3000원을 웃도는 최고급 과자로 세계 시장을 석권했다. 유럽산 패션 명품은 원가(原價) 대비 수천 배의 가격표가 붙지만 불티나게 팔리고, 독일산 최고급 승용차는 전 세계 부유층의 필수품이 됐다. 이런 고부가가치 제품 덕에 독일 근로자의 시간당 임금은 37달러로 미국 근로자(24달러)의 1.5배에 달한다.
민주당 손학규 대선 후보가 내세운 '저녁이 있는 삶'은 정치 구호로는 매력적이지만, 경제적으로 이를 구현하자면 사회경제 모델을 바꾸는 수준의 고강도 개혁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김홍수 경제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08/09/2012080903147.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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