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3. 8. 00:39

애니콜은 우리 산업사의 명작(名作)이다. 엄청나게 많이 팔렸고, 지금의 삼성전자를 키워냈다는 이유 말고도 또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로서 최초의 명품 반열에 올랐다. 일본의 스시나 렉서스처럼 고급 소비자들이 찾는 제품 말이다. 우리는 인모(人毛)를 모으고, 무연탄과 텅스텐을 캐내고, 1달러짜리 와이셔츠를 만들어 수출 목표량을 채웠던 나라이다. 1990년대 초 해외여행 자유화 초기만 해도 "도대체 우리나라가 수출하는 상품은 어디에 있는 거야"라고 궁금해했다. 그런 한계를 최초로 돌파한 상품이 애니콜이었다. 뉴욕과 파리의 멋쟁이들이 앞다퉈 애니콜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2000년대 중반 해외 전시회에 갔을 때 기자가 들고 간 최신형 애니콜에 놀라서 탄복하는 외국 기자들을 보고선 기자가 더 놀랐던 기억이 또렷하다. 지금은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땐 정말 꿈 같은 얘기였다. 그게 불과 10여년 전이었다.

애니콜은 어떻게 세계 명품이 됐을까? 정말 궁금했다. 그 무렵 전 세계에 팔려나가는 애니콜 전부를 생산하던 구미공장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당시 공장장은 김종호 현 삼성전자 세트제조담당 사장이었다.

"어제 이사했다면서?" "동생이 아프다더니 괜찮니?"

김 공장장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구미공장의 경영진은 2000명이 넘는 직원을 꿰뚫고 있었다. 직원 대부분은 실업계 고교 출신이었다. 당시 인문계 고교 진학률이 60%가 넘고, 실업계 고교에서도 대학 진학률이 50%에 이르던 시절 공장으로 온 젊은이들이 '세계 1등'을 만들고 있었다. '대외비(對外?)'라는 공장 내부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는데 거기엔 '메모'가 가득했다. '이 기계의 각도는 1도 낮추면 훨씬 효율이 좋다' 등 현장의 아이디어들이었다.

이기태 당시 삼성전자 사장은 식당에서 밥을 먹다가 메뉴가 마음에 안 들면 숟가락을 던졌다고 한다. "이런 밥을 먹고 어떻게 세계 1등의 휴대전화를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구미공장에서는 현장 직원을 '작업자'라고 부르면 쫓겨났다고 한다. '프로'라고 불렀다. 이들은 단순 작업이 아니라 혼(魂)을 담은 일을 했다. 그들은 "전 세계 공장 중에서 하나가 살아남는다면 구미공장"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회사는 '프로'들에게 그냥 아이디어를 내라고, 그냥 열심히 하라고, 그냥 협력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생뚱맞게 '종이비행기 멀리 날리기 대회'를 연 뒤 1등 종이비행기를 놓고 어떻게 만들었는지 함께 연구해보기도 했다. 거기엔 멀리 날 수밖에 없는 비결이 있었다. 체육관을 빌려서 초대형 도미노 게임도 했다. 이를 통해 팀워크와 정보 공유가 왜 중요한지 알 수 있었다. 생산라인 개선 작업은 아침밥 개선안부터 받았다. 직원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였다.

연초 우리 산업계에 들려오는 소리가 밝지만은 않다. 그래서 해묵은 애니콜 신화를 꺼내봤다. 흘러간 성공 신화에 매몰되는 게 망하는 지름길이라고 하지만 위기 극복의 기본도 성공 경험에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인열 산업1부 차장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5/01/05/2015010504335.html



Posted by 겟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