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출장 때 들렀던 영국 런던의 카페 지퍼블랏(Ziferblat)에서 메일 한 통을 받았다. '지금 진행 중'(So this is happening)이란 제목의 메일에는 턱수염을 기른 한 손님이 열정적으로 피아노 치는 동영상이 첨부되어 있었다.
지퍼블랏은 러시아와 영국에서 트렌드를 선도하고 있는 글로벌 카페 체인이다. 특이한 것은 커피를 파는 게 아니라 시간을 판다는 점이다. 이 안에서는 다양한 고급 커피와 차·빵·쿠키·과일이 모두 무료다. 대신 1분에 5펜스(약 9원)를 내고 공간을 빌린다. 극단적으로 가정하면 50원도 안 되는 돈으로 고급 에스프레소(5분이면 한 잔!)를 즐기는 일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손님만 있다면 가게가 금방 거덜나겠지만 다른 시각으로 보면 카페 입장에서도 쌍수를 들어 환영할 일이다. 노트북 하나 달랑 들고 와서 몇 시간 동안 4인용 테이블을 독차지하는 젊은이가 요즘 오죽 많은가.
지퍼블랏의 성공 이유를 '분(分)제'라는 창의적 발상으로 보는 경제적 해석이 우세하지만, 문화적 시선으로 보면 그 의미가 조금 더 확장될 수 있다.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로 한국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마르셀 에메(1902~1967)의 단편 중에 '생존 시간 카드'가 있다. SF적 상상력으로 가득한 이 단편의 핵심 설정은 바로 시간을 거래한다는 것이다. 부자들은 돈은 많은데 시간이 없고, 가난한 사람들은 시간은 많은데 돈이 없다. 이 소설에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에게 자기 시간을 팔아 하루하루를 꾸려나간다. 부자의 달력에는 3월 34일과 12월 45일이 가능해지고, 가난한 사람의 달력은 1월 14일에서 끝나는 식이다.
이야기를 한 번 더 확장하면 현대의 시간 도둑은 과연 누구냐로 이어질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는 인간의 하루 24시간을 누가 더 많이 빼앗느냐 싸움이다. 이 싸움에서 스마트폰은 지난 5년간 '무적(無敵) 무패(無敗)'의 대기록을 이어가고 있다. 책이나 잡지, 눈앞의 친구나 가족과 나눠갖던 시간이라는 희소한 자원을 독점하고 있는 것이다. 카페에 마주앉은 연인이 말없이 자신의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모습은 이제 뉴욕과 서울만의 풍경은 아닐 것이다. 소설가 김영하는 이렇게 꼬집은 적이 있다. 에메의 소설에서는 부자가 빈자에게 돈을 주고 시간을 사지만 현실에서는 애플과 삼성이 만든 스마트폰이 공짜로 우리의 시간을 빼앗아가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 모두는 자기 시간 지키기에는 혈안이면서도 그렇게 가까스로 지켜낸 시간을 엉뚱한 도둑에게 자발적으로 헌납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퍼블랏에 들어가면 최신식 스마트폰 대신 고전적인 탁상시계를 하나씩 준다. 가상 세계가 아니라 실제 삶에서 얼굴을 맞대고 새로운 경험과 대화를 나누자는 취지다.
여름휴가 시즌이 시작됐다. 이번 여름에는 부디 시간 도둑과의 한판 승부를 펼쳐볼 수 있기를. 정말 소중하고 귀한 삶의 순간들은 스마트폰 액정 바깥에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어수웅 문화부차장
http://premium.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7/15/2014071504065.html
2014. 12. 3. 1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