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은 두 가지가 불완전해
수도승처럼 못 살았고, 세상의 온갖 재미도 못 누려
결국 이렇게 학자로 살아"
"학생들이 시위할 때 '우리 하나가 되자'고 하는데
'하나'에서 벗어나면 안 되나? 집단적 열정은 위험할 수도"
이 사소한 현실 앞에서 '한국 인문학의 거인(巨人)'이 무력해지다니…. 그와 만난 것은 최근 '깊은 마음의 생태학'이라는 책이 출간됐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독자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그것이 헤엄치고 있는 물결의 색깔에 따라서 변하는 것'이라는 구절이 인상적이었다.
"어느 날 내가 좋아서 고른 어떤 옷을 입고 나갔는데 이미 많은 사람이 선호하는 스타일과 비슷하지 않던가. 붉은 물속에는 붉고 푸른 물속에는 푸르게 물드는 것처럼. 내 생각이라는 게 자기가 속한 시대와 체제에 자기도 모르게 맞춰가고 있다."
―자기가 생각해낸 것 같지만 그게 자기 생각이 아니라 외부에서 왔다는 뜻인가?
"그렇다. 집단 속에서 자기 본래의 마음으로 어떻게 갈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맹자에 나오는 '구방심(求放心·학문은 놓아버린 마음을 찾는 것)'이라는 구절이 맞는 것 같다."
―선생은 집단보다 개인의 깊은 생각, 반성적 사유에 더 관심을 보여왔다.
"우리 사회는 집단의식을 지나치게 강조한 면이 있다. 학생들이 시위할 때 '우리 하나가 되자'고 한다. '하나'에서 벗어나면 안 되는 것처럼 됐다. 물론 어떨 때는 그게 필요할지 모르나,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는 크게 도움이 안 된다."
"집단적 열정은 한쪽으로 쏠린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저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다른 의견에 대한 증오에 기초한 신념과 확신들이 좋은 사회를 만들기는 어렵다. 이런 신념이나 확신은 오히려 새로운 갈등과 폭력의 원인이 될 뿐이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게 '진영 논리'에 갇히게 된 것 같다. 어떤 사안에 대해 반응할 때 '우리 편이냐 아니냐?'를 먼저 묻는다.
"외국에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이슈를 놓고 옳고 그름을 따지기보다 먼저 편을 나눠버린다. 가령 '4대강 사업'은 치수(治水)를 위해 필요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진보 진영에서는 무조건 반대했다. 이를 어떻게 하느냐로 따져야 하는데, 아예 그 자체를 반대한 것이다."
―'토건사업'이라고 반대한 걸로 안다.
"그렇다면 세종시 정부청사 이전은 왜 반대하지 않나. 똑같이 '토건사업'인데, 세종시는 찬성하고 4대강은 반대하니 스스로 모순에 빠진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느냐'인데, 이에 대한 논의는 없다. 선거 때면 '무엇을 하겠다' 공약이 쏟아지고, 이를 못 지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생의 말씀대로, 같은 식재료를 갖고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따라 천차만별의 요리가 나오는 것이다.
"현 정권의 규제 개혁 이슈도 그렇다. 사실 규제 개혁 자체가 목표가 아니다. 규제를 푸는 것이 대기업이나 기득권자에게 이로울 수도 있고, 서민에게 혜택이 될 수도 있다. 어떤 규제를 왜 푸느냐를 따져야지. 우리는 집단에 휩쓸려 복잡한 문제들을 따져보지 않고 미리 재단하는 경우가 많다."
―규제 개혁이 나온 김에 박근혜 대통령의 '소통'에 대해 말들이 있는데.
"소통은 여러 사람과 많이 얘기하는 것만이 아니다. 가령 박 대통령이 시장 개방과 규제 개혁을 내세울 때, '이것이 일자리 창출과 복지제도 강화를 위해 필요하지만 이런 부작용도 생길 수 있다'고 설명하면 이미 소통이 되는 것이다. 소통에는 이런 합리적 사고가 더 중요하다."
―나는 합리적이라고 생각하지만 상대는 그렇게 안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은가?
"우리 풍토에서는 그럴 수도 있지만, 보편적으로 합리성이 있으면 대놓고 반대는 못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 합리성이 통한다면 어떻게 해서 북한 체제를 추종하는 세력이 생길 수가 있을까?
"막스 베버(독일의 사회학자)는 '정치는 악마와의 협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했다. 어느 정치 체제도 정도의 차이일 뿐 강제력, 법에 근거한 폭력이 들어 있다. 이런 측면에서 소위 '종북 세력'은 어떤 체제를 선택하느냐의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를 제어하는 것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와 충돌한다. 하지만 이를 허용하면 우리 내부 질서와 평화에 위협이 된다는 정책적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어느 정치 체제에도 폭력성이 존재하고, 다만 북한은 그 정도가 몹시 심하다는 것이다. 결코 북한을 옹호하는 얘기가 아니다."
―선생이 생각하는 좋은 사회는?
"개인의 성찰이 있는, 집단에 휩쓸리지 않고 한 번 더 생각하는 사회다."
―'성찰(省察)'이란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을 합리성을 기반으로 비판적 반성을 하는 능력이다. 민주주의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때 작동되는 것이다."
그는 이런 학자적 입장에서 흔들린 적이 없었다. 6년 전 '광우병 촛불시위' 당시 진보 진영 학자들은 "거리에서 새로운 민주정치의 활력을 발견한다"고들 했지만, 그만은 "그것은 민주주의의 활력이 아니라 그것이 바르게 기능 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소셜네트워크 등 인터넷의 발달로 즉각적인 반응과 집단적인 쏠림이 심화했다. 어떤 면에서 대중은 더욱 조작하기 쉬운 대상이 된 게 아닐까?
"민주주의 제도를 유지하려면 그 속에는 '정신적 자산'이 요구된다. 구성원들은 이성적이며 도덕적 기준을 갖고 있고, 그런 문화적 전통이 있어야 한다. 특히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지식인들의 존재도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명사나 지식인들은 튀는 언행으로 매스컴에 자주 노출되면 만들어지는 것처럼 됐다. 이들에게서 깊은 관점과 지식의 위엄은 빠져 있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우리 정신적 전통이 단절된 것도 한 이유가 될 것이다. 옛날에는 '수기(修己)'가 공부의 목표였다. 퇴계(이황)를 봐도 '심학(心學)'을 중시했다. 하지만 그 뒤 실학이 들어오면서 공리적인 것이 유일한 가치처럼 평가되고, 이런 정신적인 부분은 잊혀졌다."
―가치에 대해 얘기하면, 과거에도 그렇지만 지금은 돈이 아예 모든 가치를 지배한 것 같다.
"돈의 소유도 어느 한도가 넘으면 더 이상 행복을 주지 못한다. 재벌이라고 하루에 대여섯 끼 먹는 것도 아니고, 매일 호의호식하면 그 맛이 그 맛일 것이다. 명품을 갖는 것이 정말 절실하다면 돈을 모아서라도 사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이면 그건 자기 생각이 아닌 것이다. 가치에 대해 자기 생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얼마 전 301억원을 받는 대기업 회장의 연봉이 공개됐을 때, 개인적으로 "나는 300년 동안 살아남아 계속 일하면 되겠구나"라며 웃었다.
"스위스에서 CEO의 연봉을 제한하는 투표를 한 적이 있었다. '저놈들은 저렇게 받는데 나는 왜 적냐' '그래도 자유 시장 체제를 제약해서 안 된다' 등을 놓고 다툰 것이다. 결국 부결됐다. 이는 스위스 사람들의 성숙한 의식을 보여준 것이라고 본다."
―왜 그걸 성숙한 의식이라고 보나?
"공산주의 체제는 당(黨)의 지침에 따라 움직이지만, 자유로운 사회는 누구 지시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 삶에 대한 생각에서 이뤄진다. 구성원들에게 '네 마음대로 살아라'고 맡겨놓아도 안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제 민주화'가 지난 대선의 이슈가 됐듯이, 빈부의 불균형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과제가 아닐까?
"평등에는 세 가지 측면이 있다. 첫째는 '당신만 왜 잘 먹고 사느냐. 나도 잘 먹고 살아보자'는 시기심과 관계 있다. 둘째는 불만이 누적될 경우 체제를 위협하는 싸움이 벌어질 수 있다. 그럴 경우 체제 유지를 위해 타협한다. 셋째는 내 삶만큼 저 사람들의 삶도 중요하다는 도덕적 인식에서 평등이 생겨난다. 좋은 공동체에는 타협과 법·제도만이 아닌 이런 정신적 자산이 필요한 것이다."
―선생은 대학에서 영문학을 가르쳤지만, 거의 모든 인문학 영역을 섭렵하고 저술활동을 해왔다.
"그러다 보니 깊이 하지 못했다."
―어떤 계기로 폭넓은 공부를 하게 됐나?
"초등학교 시절의 일부는 일본강점기 때 보냈고, 중학교 3학년 때는 6·25가 터졌다. 대학에 들어가기 전에 휴전이 됐고, 그 뒤로도 우리 사회는 격변의 세월이었다. 이 때문에 내가 어떤 세계에 살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됐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세월이 갈수록 내가 아는 것이 부족하다는 걸 느낀다."
―후배 학자들은 선생에 대해 "사상의 넓이와 깊이" "인간과 세계를 보는 최고 수준" "우리에게 길잡이가 되어준 통찰의 등대"라고 찬사를 하는데도.
"우주는 137억년 동안 진화해왔다. 우주의 시간에서 보면 내가 사는 삶은 1초도 안 된다. 방대한 우주의 시공간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허무감이 있지만…, 내게 주어진 짧은 시간은 정말 소중한 것이다."
―지식을 추구하면서 책을 써온 삶은 완벽하지 않은가?
"두 가지 면에서 불완전했다. 하나는 수도승처럼 좀 더 정신적인 삶을 못 살았다. 그런 삶이 의미 있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또 하나는 세상의 온갖 재미를 누려보지 못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양립이 가능한가?
"하나를 선택하면 다른 것을 잃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렇게 살아온 것이다."
삐뚤게 주차됐던 승용차를 몰고 그가 먼저 출발했다.
☞김우창 선생
서울대 영문학과 졸업. 미국 코넬대 대학원을 거쳐 하버드대에서 미국문명사로 박사학위. 고려대 영문과 교수, 이화여대 석좌교수 역임. ‘궁핍한 시대의 시인’ ‘이성적 사회를 향하여’ ‘성찰’ 등 20여권의 저서가 있다.
최보식 선임기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4/04/07/201404070187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