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이영훈]경제민주화 이전에 ‘신뢰’구축이 먼저
한국 경제는 저성장 시대에 들어섰다. 어려운 시절이 기다리고 있다. 산업 간, 계층 간 소득 불균등도 심화하고 있다. 여야를 막론하고 ‘경제민주화’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는 겉의 증상만 보는 대증적(對症的) 방안이다. 빈곤층 문제는 소수 부유층 때문이며 중소기업의 곤란은 대기업 때문이고 골목상권 정체는 대형 유통업체 때문이라는 대증적 진단으로는, 한국 경제의 모순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거나 바른 해법을 모색하기 힘들다.
자본주의는 나라마다 나름의 얼굴을 갖는다. 한국에는 한국형, 미국에는 미국형 자본주의가 있다. 나라마다 다른 문화가 상이한 유형의 자본주의를 만들어낸다.
한국형 자본주의의 특질을 지적하기는 어렵지 않다. 노동자 근속연수가 짧아 1년 미만 근속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25개국 중 1등인 것이 그 하나다. 경제 규모에 비해 사업체 수가 지나치게 많은 것도 또 하나의 특질이다. 2009년 실질국민소득 100만 달러당 중소기업 수는 한국이 2.64개인데 일본은 1.11개, 미국은 0.45개다. 사업체 형태가 모조리 주식회사인 것도 한국만의 특질이다.
이 같은 특질의 근저에는 ‘저(低)신뢰’라는 문화적 조건이 자리 잡고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한국을 저신뢰 사회로 분류한 이래 이를 입증하는 국제비교가 몇 차례 행해졌다. 그에 따르면 한국사회 신뢰지수는 멕시코보다는 높으나 OECD 평균을 밑돌고 있다. 그 대신 갈등지수는 OECD 4위다.
한국이 ‘저신뢰 사회’인 것은 한국인의 가치관이 물질주의적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연원이 깊다. 일반적 통념과 달리 한국의 전통사회는 공동체로 조직되지 않은, 분산적 개인으로 구성된 저신뢰의 물질주의 사회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만 해도 당시 전국 3만4665개 자연 마을을 대상으로 한 정부 조사에 따르면 리더십이 충분했던 마을은 9%에 불과했고 나머지는 리더십이 없거나 후진적인 마을이었다. 한마디로 한국은 잘 조직된 공동체사회가 아니었다. 19세기 말 한국을 찾았던 외국인들이 “양반끼리 모여서 하는 행사나 모임은 있어도 전 주민이 공유하는 의례는 없다”고 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 일상에서 그대로 재현된다.
예컨대 중소기업이 겪는 곤란은 대기업 횡포 때문만이 아니라 중소기업 자체가 신뢰를 기반으로 한 단체가 아니라는 점에 문제가 있다. 젊은이들이 중소기업에 희망을 걸지 못하는 이유는 가족경영이 대부분이어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부장, 임원, 사장이 될 수 없으리라는 불안 때문이다. 사업주 역시 이를 당연시해 인재를 키우지 않는다. 중소기업끼리 공동으로 협심해서 시장을 개척한다거나 하는 활동도 결여돼 있다. 지난 20∼30년간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이 결코 적지 않았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은 이런 사회적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처방을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경제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경제민주화로만 접근하는 것은 한계가 분명하다. 오히려 그것은 이미 나타나듯 정치적 갈등만 증폭시킬 가능성이 크다. 저성장 시대를 맞아 사회 자체가 충격을 흡수하고 고통을 분담하고 혁신을 수행하게 하는 노력과 정책이 다양하게 개발돼야 한다. 위기를 맞아 한 사회가 어떤 양태의 대응을 보이는지는, 다시 말해 갈등을 증폭시키는지 협력을 고양하는지는 그 사회의 지성과 도덕 수준을 대변한다.
마을이, 기업이, 협동조합이, 종교단체가 이 세상을 인간이 살 만한 생활공동체로 가꾸는 일에 발 벗고 나설 필요가 있다. 규제와 세금 일변도의 ‘경제민주화’에는 이 같은 사회 고양적 발상이 결여돼 있다. ‘경제민주화’는 이 나라가 여전히 정치 만능의 저신뢰 사회임을 얘기하고 있다.
이영훈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